어떤 책은 쓰는데 수십 년, 아니 평생이 걸린다. 유리 슐레비츠의 책 『우연 Chance』이 그렇다.
1.
지은이인 유리 슐레비츠는 그림책 좀 보는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칼데콧 상 수상 작가이다. 그런 작가가 2020년에 낸 책이다. 한국에서는 2022년 올해 번역 출간되었다.
그가 살아온 이력은 무척 복잡하다. 그는 1935년에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전쟁이 발발한 후 유대인 박해를 피해 다른 나라로 도주했다. 러시아 비알리스톡과 투르키스탄에서 난민 생활을 했고, 라이프하임 난민수용소에서 생활했다. 이후 파리로 건너온 후, 이스라엘로 이주했다가 20대에 최종적으로 미국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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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로운 책 『우연』은 무국적자, 난민으로 살았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정도의 경험이라면 평생 트라우마가 되는 법이다. 어린 자신은 너무도 무기력했으며, 부모님은 자신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상처를 줬다. 이런 기억에 대해 거리를 두고 쓰는 게 정말로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이 책을 노년에 쓴 이유와 연결될 것이다. 이제는 정말로 고통스러운 경험을 털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기도 하고, 세상이 이제야 난민이라는 소수자의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2.
이 책은 유대인 수용소만큼 잔혹하지는 않더라도, 굶주리고 차별받고 내쫓기고 놀림당하고 이해받지 못했던 유년기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예상되다시피 책에는 섬뜩한 장면들이 나온다. 투르키스탄에서 아버지는 식량을 구한다며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어머니와 다섯 살 유리 둘만 남는다. 둘이서 남아 굶고 또 굶는다. 그러다 어느 날 엄마는 유리에게 근처의 토마토밭에서 토마토 하나만 따다 달라며 부탁한다.
유리는 토마토를 따다 일꾼에게 적발된다. 커다란 남자 어른이 주먹을 휘두르자 대여섯 살의 굶주린 아이는 그대로 나가떨어진다. 하지만 유리가 더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정신을 잃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차라리 굶어 죽겠다고 말하는 엄마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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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도 안식처가 되지 못한다. 어린 사내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맨주먹으로 권투 연습을 한다. 이들은 당연하게 유대인인 유리를 불러 샌드백처럼 주먹을 꽂는다. 굶주림에서 구원받아 문명의 세계에 안착하고 난 후에도, 유리는 약자라는 이유로 여전히 그 안에 도사리는 야만의 대상이 된다.
이 모든 고난 속에서, 유리는 그림을 그렸다. 끝없이 그렸다. 그림만이 배고픔을 잊을 수 있도록 도와줬고, 그림만이 샌드백으로 따돌림받는 시간을 견디게 해주었고, 그림만이 자신을 끌어 올려 상을 받게 해주었으니까. 그에게 그림은 더 나은 위치로 올려주는 동앗줄이었던 것이다.
3.
이런 경험을 담담하게 쓰려면 내면을 몇 번이나 갈아엎어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마지막 작품이 될 수도 있는 이 책을, 그는 어떤 마음으로 쓰고 그렸을까.
유리 슐레비츠는 뛰어난 비주얼 테크닉을 구사하기로 유명한 작가다. 그런데도 이 작품에서는 거친 펜과 목탄만으로 단순한 그림을 그렸다. 고갱이만 남긴 고통은 더욱 생생하고 처절하다. 그의 내면 속에서 몇십 년을 접고 접고 또 접어서 단순화된 고통이 읽는 사람을 더욱 절절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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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고난’이나 ‘슬픔’이 아닌 ‘Chance’인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Chance’는 완벽히 ‘우연’으로 대치할 수 없는 단어다. 유리 슐레비츠는 이 단어를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인생의 풍파에 속절없이 휩쓸려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데 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몇 개의 선과 몇 개의 그림으로 모든 고통을 뭉뚱그릴 수 있을 때까지 살아남았다. 그 생존의 과정이 어떤 것인지 말하고 싶어서 ‘Chance’를 제목으로 삼은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 본다.
이 작품을 통해 난민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리고 싶었을 유리 슐레비츠에게 존경을 표한다.
원문: Joyce Park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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