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그랬는지 잊어버렸는지 / 가방 안 깊숙이 넣어두었다가 / 헤어지려고 할 때 그제서야 / 내게 주려고 쓴 편지를 꺼냈네
집으로 돌아와서 천천히 펴보니 / 예쁜 종이 위에 써 내려간 글씨 / 한 줄 한 줄 또 한 줄 새기면서 / 나의 거짓 없는 마음을 띄웠네
나를 바라볼 때 눈물짓나요 / 마주친 두 눈이 눈물겹나요 / 그럼 아무 말도 필요 없이 서로를 믿어요
- 유재하, 우울한 편지 중에서
편지는 디지털 메시지보다 진실하다
문자 메시지와 카톡 등 각종 SNS 등이 대세인 지금, 소통의 수단으로 편지는 왠지 어색해졌다. 하지만 편지 특유의 매력까지 거부하긴 어렵다. 사람들은 편지가 정보 전달을 넘어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믿는 것 같다.
그렇다고 편지가 진짜 마음을 전달하는지는 의문이다. ‘하얀 종이 위에 곱게 써 내려간 너의 진실 알아내고 난 그만 울어버렸네’와 같은 노랫말은 편지가 진실을 전달한다고 설득하지만, 과학적으로 옳은 믿음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생각해 보면 내 학창 시절만 해도 모든 사랑의 시작은 편지였다. 바로 전해주지도 못하고 누군가에게 부탁해 전달한 편지에 답장을 기다렸던 시간들은 통째로 애틋했다. 긴 편지를 쓰기 힘들 때는 대학 학보에 짧은 글을 함께 보내 마음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손으로 눌러 쓴 편지가 디지털 메시지보다 더 진실된 것이라고, 적어도 나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믿는다. 편지는 그저 아날로그적 감성이 아니라 진정성의 전달 매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연애를 시작하는 젊은 세대에도 <우울한 편지>의 가사처럼 편지가 서로를 더 솔직하게 만들고, 신뢰도 키울 수 있을까?
서로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텍사스대학교 오스틴 심리학과 리처드 슬래처와 제임스 페니베이커 교수는 「How Do I Love Thee? Let Me Count the Words: The Social Effects of Expressive Writing」라는 제목으로 편지가 연인 사이의 관계적 친밀감을 높일 수 있다는 연구를 Psychological Science에 발표한 바 있다. 제목을 우리말로 해석하면 “내가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냐구요? 단어를 세어 볼게요”다. 내가 표현한 단어의 양이 사랑의 크기를 표현한다는 아주 감성적인 제목이다.
제목에서 you를 고어적 문체인 thee로 표현한 것은 이 연구에 고전적 소통 수단인 편지가 활용됐기 때문이다(영어 성경을 즐겨 읽는다면 thou나 thee와 같은 단어에 익숙할 것이다). 물론, 실험에서는 요즘 젊은 세대에 맞게 편지는 이메일로 대체되었다.
연구자들은 실험에 참가한 43쌍의 연인을 무작위로 두 그룹으로 나눈 후, 먼저 각자 관계의 만족도 등을 측정했다. 실험 그룹에게는 상호 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관해 3일 동안 하루 20분씩 이메일을 써달라고 요청했고 , 통제 그룹에게는 그날 한 일이나 활동에 관해 글을 써달라고 했다.
단순히 한 일을 쓰는 것에 비해 관계에 관한 생각과 느낌을 쓰는 것은 더 깊은 사유를 요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실험자는 실험의 목적이 일상생활이나 관계에서 활용되는 단어의 유형을 계량화하기 위함이라고 안내하여 실험의 의도를 숨겼다. 연구자들은 실험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에게 주고받은 이메일 외에 10일 동안 주고받는 휴대폰 메시지를 제출하도록 하여, 실험 집단과 통제 집단이 서로의 연인에게 쓰는 언어를 따로 분석했다.
연구 결과, 3일 동안 각자의 관계에 대해 20분 동안 글을 쓴 집단은 일상생활에서 파트너에게 보내는 단어의 질이 달라졌다. 아래 표에서 보는 것처럼 실험 집단에 참가한 사람들이 통제 집단에 비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늘어났다. 서로가 솔직한 의사소통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서로의 관계에 대해 장문의 글을 써보는 것은 관계의 깊이를 더해주는 것이 분명하다.
실험자들은 실험이 끝나고 3개월이 지나서도 실험에 참가한 커플이 관계가 계속 유지되는지, 만족도는 어떠한지를 분석했다. 서로의 관계에 대해 글로 적은 집단이 관계적 안정성과 만족도 면에서 더 좋은 결과를 보였다. 결국, 서로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글로 써보는 것이 서로를 솔직하게 만들고 신뢰를 높여준다는 것이 연구의 결론이다.
유재하의 가사처럼 한 줄 한 줄 또 한 줄 새기면, 거짓 없는 마음이 띄워진다. 누군가와 커뮤니케이션의 질을 높이고 싶다면 지금 당장 대화를 시도하지 말고 20분 정도 생각을 정리한 후에 메일을 보내도록 하자. 커뮤니케이션의 질은 대화의 빈도와 양이 어느 정도 보장하는 것은 맞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관계에 대해 편지를 쓰듯 한 줄 한 줄 새기는 과정이니 말이다.
원문: 박진우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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