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는 꽃가루에 눈이 따끔해 / 눈물이 고여도 꾹 참을래 / 내 마음 한켠 비밀스런 오르골에 넣어두고서 / 영원히 되감을 순간이니까
우리 둘의 마지막 페이지를 잘 부탁해 / 어느 작별이 이보다 완벽할까 / Love me only till this spring
오 라일락꽃이 지는 날 goodbye / 이런 결말이 어울려 / 안녕 꽃잎 같은 안녕 / 하이얀 우리 봄날의 climax / 아 얼마나 기쁜 일이야 (후략)
- 아이유의 〈라일락〉 중에서
이별이 기쁘고 달콤한 일이라 할 수 있을까?
라일락 꽃잎이 날리고 하늘과 바람이 완벽한 날이라고 이별이 달콤할 리 없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 이별조차도 이별은 슬픈 법이다. 그렇다면 라일락의 노랫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내가 라일락을 처음 접했을 때는 이형기 시인의 <낙화>라는 시가 떠올랐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 격정을 인내한 /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 지금은 가야 할 때
시인도 아이유처럼 꽃이 지는 풍경에서 이별을 축복이라고 표현했다. 문학적 관점에선 이 시를 역설과 비유로 설명한다. 역설은 이별이 축복이라는 모순적 표현으로 이별이 갖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일컫고, 비유는 떨어지는 꽃을 인간의 삶에 비유하여 꽃이 진 자리에서 열매를 맺듯 이별을 겪고 그 아픔에서 한 단계 성숙하는 모습을 그려낸 것을 말한다고 말이다.
나는 아이유의 〈라일락〉도 이러한 역설과 비유가 있는 한 편의 시라고 생각한다. 시적 표현으로 〈라일락〉은 나보기가 역겨워 가신 님의 떠나는 길에 진달래꽃을 뿌리는 마음일 수 있고, 님은 갔지만 나는 보내지 아니하였다고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고 노래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아이유의 〈라일락〉이 문학, 특히 현대 시의 정수를 아우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만약 진짜 이별을 달콤하게 받아들인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 마음이 이별을 달콤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얻는 심리적 이점이 있다면 어떨까? 실제 사람들은 불행한 일을 당해 어이없고 허탈할 때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상황임에도 터져 나오는 헛웃음이 분명히 있다. 실수를 저지르고 사과하는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 당황한 기억이 한 번쯤은 있지 않은가? 왜 우리 마음은 실제 경험하는 정서와 전혀 상반된 반응을 보였던 것일까?
자, 그럼 지금부터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라일락을 들여 보자. 사람들은 간혹 실제 경험하는 정서와 반대되는 감정표현을 할 때가 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이형적 표현(dimorphous expressions)이라고 한다.
dimorphous는 동종이형(同種二形)이라는 뜻이다. 암끝검은표범나비, 딱새 등과 같이 같은 종인데 암컷과 수컷의 모양이 다른 생물을 일컫는 생물학적 표현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이형적 표현(dimorphous expressions)을 조금 쉽게 설명하면 청개구리처럼 현재 경험하는 생각과 느낌을 정반대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그런 이형적 표현을 의외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시상대에 오르는 영광과 환희의 순간에 눈물을 흘리는 국가대표를 보면서 슬퍼서 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성모에게 초록색 트라우마를 안겨준 초록매실 광고의 “널 깨물어 주고 싶어”라는 대사 역시 대표적인 이형적 표현이다. 분명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깨물어 주고 싶은 공격성이 튀어나온다. 사람들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대상을 만나면 소리를 지르거나 꽉 껴안고 깨무는 등의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곤 한다. 분명 긍정정서를 경험하고 있음에도 청개구리처럼 정반대의 표현이 튀어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형적 표현 연구에 독보적인 심리학자가 클렘슨대학교 비즈니스스쿨의 오리아나 아라곤(Oriana Rachel Aragón) 교수다. 아라곤 교수는 예일대 심리학과 재직 당시 동료들과 함께 「Psychological Science에 Dimorphous Expressions of Positive Emotion: Displays of Both Care and Aggression in Response to Cute Stimuli」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연구의 내용은 이렇다. 연구진은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여러 사진을 보여주고 각 사진에 대한 반응을 살폈는데, 사람들은 귀여운 사진일수록 더 폭력적인 감정을 경험한다고 말했다.
그래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람들은 더 큰 귀여움에 꼬집고 싶고 깨물고 싶은 강한 공격성을 경험했다. 아라곤 교수는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사랑스러운 대상에 대해 정반대의 공격적인 표현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언급했다. 우리 말에 ‘깨물어주고 싶다’와 똑같은 표현이 베트남에도 있다.
Yêu quá, anh muốn cắn một cái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널 깨물고 싶어
초록매실 광고를 베트남에서 똑같이 제작해서 반영한다고 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체코어의 ‘muchlovat’, 프랑스어의 ‘Mignon à croquer’, 이탈리아어의 ‘Lo mangerei’, 인도네시아어의 ‘gemas’, 영어의 ‘eat you up’ 등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대상에 쓰는 공격적 표현이다.
한편, 긍정 정서를 경험하면서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부정정서를 경험하면서 정반대의 긍정적 표현을 하는 경우도 있다. 너무 화가 나는데 허탈하게 웃는다거나 민망하고 미안한 상황에서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경우가 그렇다.
왜 사람들은 이형적 표현을 하는 것일까?
이형적 표현에 담긴 심리적 기제는 무엇일까?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필요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아기를 보면 귀엽다는 감정이 듦과 동시에 지켜야 하는 보호본능이 일어야 한다. 귀엽다는 감정은 소중히 여기고 보살피려는 돌봄 행동을 유발할 것이고, 보호본능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맞서 싸울 태세를 준비하게 할 것이다. 즉, 귀엽고 사랑스러운 감정이 들 때, 공격적 감정도 함께 유발되어야 아기를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형적 표현을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항상성(homeostasis) 때문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생존에 필요한 안정적 상태를 항상 능동적으로 유지하려고 한다. 인간은 신체적 균형이 무너지려는 순간, 균형을 잡아주는 항상성이라는 자동조절 장치 덕에 환경변화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다. 추위를 느끼면 몸을 떨게 만들고, 밥을 굶으면 간에 축적된 영양을 공급하며, 한쪽 근육이 경직되면 반대쪽 근육을 조정해 균형을 잡고, 면역력이 떨어지면 코와 입을 민감하게 만들어 재채기나 콧물이 나오는 것은 신체의 항상성 덕분이다.
인간은 신체적으로도 항상성을 추구하지만 심리적으로도 항상성에 대한 욕구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심리적인 균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긍정적 정서 경험에 부정적 표현을, 부정적 정서 경험에 긍정적 표현을 한다. 그리고 만일 심리적 균형상태가 급격히 무너졌다면 이형적 표현을 통해 항상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가 크게 일 것이다. 따라서 같은 긍정 결과라도 예측가능했다면 기쁨의 함성을 지르겠지만, 예측하기 어려운 뜻밖의 결과였다면 눈물을 흘릴 가능성이 크다. 예측하기 어려운 뜻밖의 결과에 균형이 크게 무너지기 쉽고 빠르게 항상성을 유지하고자 정반대의 표현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항상성을 유지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긍정 정서를 경험하는 상황에서 나오는 부정적 표현에는 사람들마다 강하거나 약한 표현 수준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좋은 일에 부정적 에너지 수준이 높은 공격성을 표현할 수도 있고 부정적 에너지 수준이 낮은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초호화 럭셔리 리조트에 당첨됐다면 어떤 느낌일 것 같은가? 너무 기뻐서 “좋아”라며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소리를 지르는 것과 같은 공격적인 표현은 활동적인 에너지를 상징하는 반면, 기뻐서 우는 것은 감정 소모 정도가 높아 잠깐 멈추고 쉬고자 하는 욕구를 유발한다. 아라곤 교수의 다른 연구를 보면 소리를 지른 그룹은 리조트에서 활동적인 프로그램을 선호했지만, 눈물을 흘린 그룹은 조용히 휴식을 취하는 프로그램을 선호했다(“I Couldn’t Help But to Cry!” “I Couldn’t Help But to Yell “Yes!” Dimorphous Expressions Inform Consumers of Users’ Motivational Orientations).
앞으로 올림픽 등 주요 경기 시상식을 이 관점에서 눈여겨 보고, 이후 선수들의 행보를 살펴 보자. 시상대에서 기쁨을 마음껏 표현한 선수는 여러 매체를 통한 다양한 활동에 적극적이겠지만, 눈물을 흘린 선수는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조용히 휴식을 취할 것이다.
마무리하며
아이유는 이별의 순간에 콧노래를 부르며 완벽하게 아름다운 결별을 만끽한다. 게다가 이처럼 슬픈 날이 또 하필이면 ‘어쩜 이렇게 하늘은 더 바람은 또 완벽한 건지’, 아이유의 <좋은 날>의 노랫말과 같은 날이다.
좋은 날 헤어지는 것은 더 비참한 일이다. 좋은 날씨와 완벽한 바람, 그리고 라일락 꽃향기를 맡으며 이별을 예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유의 라일락이 예측하기 힘든 갑작스런 이별의 순간에 심리적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심리적 방어기제라고 생각한다.
원문: 박진우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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