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서 유능한 사람이 된다는 건 기능적으로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대체 불가능할 정도로 마케팅이나 영업을 잘하거나, 기획을 창의적으로 하거나, 기술이 좋거나 지식이 많으면 그는 ‘유능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사회 속에서 나름대로 자기를 펼치고자 한다면, 자신이 어떤 분야에서 대체 불가능한, 적어도 대체하기 어려운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계속 실험해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사회 속에서 자기의 자리 하나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 타인에게, 사랑이나 삶의 영역에서 자리 잡는다는 건 그와는 다르다. 당장 내가 내 아이의 아빠가 아니더라도, 나보다 아빠 역할을 잘할 사람은 세상에 널려 있을 것이다. 나보다 더 돈 잘 벌고, 시간 많고, 아이랑 잘 놀아주고, 교육에도 밝은 아빠가 세상에 한 무더기는 있을 법하다. ‘기능적으로’ 봤을 때, 나는 충분히 대체가능하다. 그리고 어느 누구라도 그럴 법하다.
그렇기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간다는 건 기능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억의 문제, 시간의 문제에 가깝다. 나와 당신이 이 한 번뿐인 인생에서 함께 시간을 쌓았다는 것, 그것이 서로를 서로에게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인생 전체에서 그리 많지 않은 그 아까운 시간이라는 걸 쓰면서, 서로는 서로에게 유일무이한 무언가가 된다. 어떤 유용한 기능 때문이 아니라 마음, 시간, 기억을 써서 시절을 이루게 되면서, 떼어낼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
화살촉이 무서운 것은 박힐 때가 아니라 뽑을 때이다. 박힐 때야 치명적인 부분에 맞지 않는 한 생명에 큰 위협은 없다. 그러나 뽑을 때 갈고리 같은 화살촉이 살점을 다 뜯어내고 결국 과다출혈로 사망하게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사람의 삶도 비슷할 듯하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화살촉 같은 시간을 꽂아 넣는다. 그렇게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앞에 두고 결국 얼마 없는 시간을 서로에게 바치기 때문에, 그 시간의 희소성 때문에, 그 얼마 없는 시간 자체 때문에 서로에게 유일해진다.
사회에서 대체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가는 일에는 나름대로 성취감과 보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기능적으로 따지면, 나를 대체할 존재는 반드시 있기 마련이기도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대개 다른 누군가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시간을 머금거나 투여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대체 불가능하다. 사실, 그것이 더 우리를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삶의 중심을 둘 수 있다면, 실제로 나의 시간을 받아먹고, 나에게 자신의 시간을 먹여주는 그 누군가 또는 무언가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일들을 하고, 많은 것들을 스쳐 지나간다. 그중에는 서로의 진짜 시간이랄 것, 혹은 진짜 시절이나 마음이랄 것을 서로에게 주는 존재들이 있다. 우리의 삶은 그들이 있는 그곳에서만 대체 불가능해진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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