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엄마와 아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아이는 고민하다가 “안아주는 거”라고 말했다. 나는 내심 ‘많이 좋아하는 거’ 정도를 기대하고 있었기에, 아이의 말이 생경하게 들렸다.
아이에게 사랑은 아주 구체적인 무언가인 모양이다. 기분 좋고, 따스하고, 행복하고, 평안한 느낌을 주는 구체적인 행위 그 자체, 즉 안아줌이 곧 사랑인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롤랑 바르트를 떠올렸다. 그는 섹스가 아닌 껴안음이야말로 진정한 ‘충족’의 사건이라고 적는다. 이 충족감, 또는 충일감 앞에서 욕망은 폐기된다. 욕망의 다른 말은 결핍인데, 우리는 평생 동안 우리 안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무수한 것들을 욕망하며 살아간다. 돈, 명예, 이성, 인기 등 그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는 채울 수 없는 갈망을 일시적으로만 덮는 환영들이다.
롤랑 바르트는 ‘포옹’이 그런 끝없는 결핍과 욕망의 연쇄를 꺼뜨리는, 충일의 순간이라 말한다. 완벽한 껴안음의 순간에,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그저 그 따사로운 평온 속에서 완전하게 채워진다. 그 속에서는 다른 모든 욕망의 작동들이 정지하며, 그저 ‘괜찮은’ 상태가 된다.
욕망과 결핍이 인생을 계속 ‘어딘가’로 이끌고 간다면, 포옹과 충일은 우리를 여기에 머무르게 한다. 꼭 껴안고 있는 건 더 이상 불안에 떨며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쫓는 일로부터 우리를 정지시킨다. 그래서 바르트는 포옹이야말로 사랑에서 최고의 순간으로 꼽는다.
어느 겨울, 며칠 동안 보지 못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굴리다가, 멀리서 사랑하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여, 잰걸음으로 걸어가 서로를 포옹하는 순간 세상은 정지한다. 주위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그들의 시선은 아무래도 좋은 것으로 멈춰버린다. 인생 내내 마라톤 하듯이 어딘가 달려왔지만, 그 순간만큼은 여기가 종착지라고 느낀다. 포옹은 끝없는 욕망이 아니라 충일한 정지다.
아이는 언젠가 “왜 아빠보다 엄마가 더 좋아?”라는 나의 볼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엄마가 더 많이 안아주니까.
그 말을 듣고 나는 꽤 반성하기도 했다(물론 나는 나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서, 주로 격렬하게 몸으로 놀아주거나 악당 역할을 해주긴 한다). 아이에게 사랑이란 아주 구체적인 감각이다. 어른들이 따지기 바쁜 능력이니 미의식이니 하는 것들이 아니라, 가장 직접적이고 섬세하며 생생하게 존재하는 감각의 향연이다. 아이는 그 누구보다 그것을 정확하게 알고, 솔직하게 말할 줄 아는 것이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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