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는 기본적으로 남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특히, 그 누군가의 인생이 통째로 걸릴 만한 일들을 많이 하게 되는 일이다. 일을 잘하면 바뀌는 건 남의 인생이고, 나의 인생이 극적으로 바뀌진 않는다.
이를테면, 내가 축구를 잘하는 건 나의 일이고 잘하면 내가 빛나고 좋은 일이다. 내가 글을 잘 쓰는 것 역시 대개 나의 일인데, 그 일의 결과가 결국 나에게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호사의 일은 그렇진 않다.
물론, 변호사도 일을 잘하면 성공보수를 받는다든지 일 잘하기로 소문나서 수임이 많이 들어온다든지 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보면, 요즘에는 사건 수임이란 인터넷 마케팅을 얼마나 잘하느냐 같은 게 결정적이지, 사건 하나하나를 얼마나 정성스레 ‘나의 일’처럼 잘하는지는 다소 부차적이 되어버린 시대이기도 하다.
또 판사의 판결에 의해 달라지는 사건의 결과를 변호사가 완전히 책임질 수도 없다. 그러면 변호사는 남의 일을 말 그대로 남의 일처럼 여기기가 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좋은 변호사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남의 일을 가능한 한 자기 일처럼 여기는 변호사일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말이 쉽지 실제로는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누군가 돈을 줬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일을 내 일이나 나의 가족의 일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는 데는 ‘이익 계산’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오히려 철저히 이익 중심으로만 생각하면, 나의 일처럼 느낄 필요까지는 없다. 거기에는 어떤 잉여, 이익을 초과하는 무언가가 있어야만 한다. 가령, 이 사람에게 공감하거나 연민을 느끼고 함께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은 일말의 진심이랄 게 더해져야 한다.
세상에는 변호사처럼 ‘남의 일’들을 하는 직업이 있을 텐데, 아마 다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는 내가 해왔던 일 중 글을 쓰는 일보다는 가르치는 일이 변호사의 일과 비슷하다고 느낀다. 어떻게 보면 변호사의 일도 글 쓰는 일이지 누구를 가르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타인을 앞에 두고 그 사람을 ‘위해’ 일한다는 면에서 가르침과 더 닮았다.
그래서 나는 한 번씩 상상한다. 이 사람이 나의 가족이라면 내가 어떻게 했을까, 하고 말이다. 판례라도 하나 더 찾아보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판례를 하나 더 찾아보게 된다.
무슨 일이든 그 일을 해보기 전에는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나도 변호사 일을 해보기 전에는 이 일에 관해 거의 아무것도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해볼수록 느끼는 건, 기계적인 능숙함 뿐만 아니라 순간순간의 진심이 필요한 것 같다는 점이다. 속전속결로 수십 개의 서면을 써내고 한 번에 무수한 사건들을 갖고 있는 변호사가 유능하다고 여겨지는 시대라지만, 나는 내가 어느 정도 진심을 유지할 수 있는 선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소망도 가져본다.
예전에도 글쓰기 수업을 한 번에 10개씩 돌리면 큰돈을 벌 수도 있었겠지만, 한 번에 2개 이상 한 적은 없었다. 그것이 내가 진심을 유지할 수 있는 선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나의 또 다른 일에서도 자신의 균형을 어느 정도 지킬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싶다. 아니, 모든 일에서 그랬으면 싶다. 공장이나 로봇보다는 인간으로 쭉 살아가고 싶다. 그것이 나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나와 연을 맺는 모든 삶에 대한 예의 같기도 해서 그렇다.
원문: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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