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을 쓰면서 울면 안 된다고 믿는다. 물론 나도 울면서 쓴 글이 때때로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울음에 빠져들면 안 된다고, 나의 슬픔이나 절망과 하나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글을 쓸 때만큼은 그 모든 울음, 슬픔, 아픔, 절망을 어떻게든 견뎌내야만 한다.
우는 나, 슬퍼하는 나, 아파하는 나를 노려보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내가 어디에서 우는지 바라보고, 내가 왜 슬퍼하는지 또박또박 적어나가야 한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글 한 편의 마침표를 찍었을 때, 자리에 엎드려 엉엉 울어도 좋다.
글쓰기 수업을 할 때면, 나는 그것을 글쓰기의 ‘거리 두기’라고 이야기한다. 글쓰기는 거리 두기이다. 내가 하고 싶어서 터져 나올 것 같은 비명, 내 안의 요동치고 끓어 넘치는 감정, 나를 금방이라도 휩쓸어 가버릴 것 같은 마음 같은 것들을 있는 그대로 표출해버리면, 그것은 글쓰기가 아니다. 그저 비명 지르고, 소리치고, 울고 끝나는 일이다.
그러나 글쓰기는 그런 나를 집요하게 바라보는 또 다른 내가 하는 일이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나에게는 끝까지 버티고 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글로 남기는 또 다른 내가 있다. 글 쓰는 일은 그런 ‘또 다른 나’를 점점 더 단단하게 키워나가고, 그를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는 태도를 길러나가는 일이다. 그래서 계속 글을 쓰다 보면, 그 ‘또 다른 나’를 더 자주, 쉽게 만날 수 있게 된다. 언제 어디에서든지 타자기나 수첩 하나만 있으면 곧장 그 또 다른 나를 불러올 수 있다.
나는 가만히 오늘 내게 스쳐 지나갔던 무수한 인상을, 그 속에서 느꼈던 어느 순간의 감정을, 차마 내가 글로 표현하지는 못했으나 글로 될 가능성을 품은 어떤 덩어리를 비로소 잡아낸다. 그리고 그런 덩어리들을 차분하게 빚어서 하나의 글을 짜낸다. 글 쓰는 자아는, 나라는 인간의 하루를, 삶을 재료 삼아서 글을 빚어낸다. 나라는 투망을 삶이라는 바닷속에 집어 던지고, 낚아낸 몇 가지 물고기들로 요리를 한다. 그렇게 한편의 글을 만들어낸다.
글쓰기라는 게 그와 같은 일이라면, 그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런 ‘또 다른 나’를 계속 만들어나가고 불러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걸 왜 하는가, 그렇게 해서 좋은 게 무엇인가 물을지도 모른다. 사실 명확한 대답은 모른다. 그저 세상에는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나’를 가져야만 하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글쓰기가 마치 대단한 무엇이라도 되는 양 삶을 거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또 다른 나’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알게 모르게 위안을 받는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오늘 내가 보내는 나날들이 그저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나라는 존재가 응시하고, 그래서 기록되고, 그렇게 늘 내 삶을 한 번 더 다시 보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느낀다는 것이 작은 보물들을 쌓아간다는 느낌을 준다.
나는 오늘 또 저 바다에 던져진다. 때로는 이 모든 나날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오늘 하루는 무슨 가치가 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나는 나를 던지는 손길에 몸을 맡기고 저 바다로 뛰어들 수 있다. 결국 나를 거두어줄 손길 또한 바로 그와 같은 손길이라는 걸 믿기 때문이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나를 거두어서 오늘을 조금 더 의미 있고, 때론 아름답고, 때론 눈부시거나 눈물 나는 무언가로 만들어, 집 한쪽의 장식장에 고이 모셔둘 것이다. 그렇게 나의 오늘들을 빚어서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오늘 나는, 더 진심으로 슬퍼하고, 진심으로 웃을 수 있다. 이다음 순간, 그 슬픔과 웃음을 빚어낼 또 다른 내가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 나를 믿고, 그저 이 순간, 나를 던져넣을 수 있다. 때론 의심스러운 시간이라 할지라도, 그런 시간조차 결국은 회수해 작은 도자기 하나 만들어줄 또 다른 나가 역시 있기 때문에 말이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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