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글을 쓴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당시의 나는 숙제로 써야 하는 일기를 무척이나 싫어했는데, 반복되는 하루에서 억지로 무언가 쓸 거리를 찾아내는 것이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몇 번이나 혼을 내도 숙제를 해오기는커녕 큰소리로 자신의 당당함을 주장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초등학생에게 담임선생님은 이런 제안을 했다.
일기를 쓰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일기로 써오면 봐주겠어.
아마 선생님은 그 말을 하기 위해 내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아냈을 것이다.
어쨌든 집으로 돌아간 나는 곧장 공책을 펼치고 자신의 생각을 적었다. 꾸역꾸역 종이 위에 연필로 눌러쓴 ‘일기를 쓰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금세 여섯 페이지가 넘어갔다. 그 장문의 일기가 내가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무언가였다.
지금은 찾을 수 없지만 어떤 내용을 썼는지는 대충 기억하고 있다. 추억은 사진으로도 남길 수 있으며 특별한 일을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그때그때 억지로 무언가를 쓰는 일기는 아이들에게 반감을 가지게 할 뿐이라는,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딱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의 논리와 억지스러움으로 가득한 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종례 시간 담임선생님이 보인 반응은 뭔가 달랐다. 그는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반 아이들 앞에서 일기를 쓰지 않아도 좋다고 공표했다. 대신 글이 아주 좋다고, 매년 시에서 주최하는 글쓰기 공모전에 나가 볼 것을 권유했다. 그렇게 세상만사가 불만이라 어른들의 걱정을 사던 아이는, 자신 안에 이야기를 글로 쓰기 시작했다. 물론 고집은 어디 안 가서 ‘핵 문제에 대한 구체적 해결방안을 쓰시오’라는 지문에 ‘그걸 왜 초등학생한테 물어보냐’고 쓰기도 했지만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썼을 뿐인데 칭찬을 받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아무리 짜증을 내도, 소리를 질러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아 보였던 어른들이 글을 쓰면 읽어줬다. 글은 내가 세상과 진지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었다. ‘진지하다’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그때의 나에겐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이면 충분했다. 똑바로 마주하고 웃어넘기지 않는 것으로 충분했다.
돌이켜보면 나의 글쓰기에는 항상 누군가의 격려가 있었다. 야구부를 그만두고 방황하던 중학생 시절에도, 공업 고등학교에 진학해 문학과 동떨어진 삶에 허탈해할 때도, 친하게 지내던 선생님들의 조언이 힘이 됐다. 그들은 진심으로 내가 계속 글을 쓰기를 바랐고, 언젠가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을 모두 믿지는 않았지만, 삶에 큰 영향을 주었던 기회를 나는 그들을 통해 받았을 것이다. ‘글 쓰는 삶’이란 스스로 손에 넣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계속해서 나를 지켜주었기에 온전할 수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그 기억을 점차 잊었던 것 같다. 혼자 해결하고 결정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면서 글쓰기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많이 외로웠다. 깊은 밤 무언가를 써내는 일이 예전처럼 즐겁지 않았다. 분명 조급함도 있었다. 언제까지 이런 시간이 이어질 수는 없을 테니까. 더 이상 학생이 아니니까. 빨리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니까.
하지만 그럴수록 내 안에서는 무언가 변해가고 있었다. 글을 이끌어가던 요구는 강박이 되고, 자신을 다독이던 목소리는 점점 크고 거칠어졌다. 쓰지 못하는 날이 길어질수록 나는 눈에 띄게 못난 사람이 됐다. 일기 쓰기를 싫어하던 아이는 억지로라도 쓸 거리를 찾기 위해 스스로를 쥐어짰다. 혼란스럽던 여름이 몇 번이나 지나고, 짙은 새벽에 적응이 됐다.
나는 왜 글을 쓰는 걸까. 막다른 길에 몰려있는 느낌을 받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나는 왜 쓰는 걸까. 이런 글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냥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고개를 돌린 채 모든 걸 비웃어버리면 편하지 않을까. 더는 버티지 못한다며 침대에 몸을 던졌다가도, 나는 오래지 않아 다시 책상으로 돌아갔다.
모니터 화면에는 언제나 지워버리고 싶은 것들이 아른거렸다. 후회스럽거나 원망스러운 기억. 무엇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이 그 기억에 비쳐 보였다. 지금이라면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텐데. 하지만 책상 앞에 나는 푸념을 늘어놓기보다 그저 그 시절의 자신을 가만히 마주했다.
너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
처음 글을 쓴 건 자신의 의견을 더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는데, 어느새 나는 글쓰기에 기대어 삶을 버텨내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기술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태도에 가까웠다. 글을 쓸 때만큼은 나도 자신에게서 고개 돌리지 않을 수 있었다. 천천히 두 눈을 마주 볼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나는 도망치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을 해도 괜찮을지 확신이 없을 때나,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고 대꾸할 힘조차 없을 때. 꾸역꾸역 종이 위에 눌러쓴 글씨가 누군가를 상처 입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대신 ‘해야만 하는 이유’가 더 많이 떠오를 때. 나는 노트북 전원을 끄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곳으로 달아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왜 아직도 글을 쓰냐고 묻는다면, 나는 글쓰기가 자신을 돌보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글쓰기가 자신을 격려하고, 자신을 긍정하고, 끝내는 자신을 포함한 우리를 온전히 지켜내는 일이라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진지함’이 글쓰기에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어린 시절 나를 마주 봐주었던 담임선생님처럼, 외로운 날들을 지켜주었던 누군가의 말처럼. 내 글도 언젠가의 누군가를 지켜주기를 바라본다. 이 삶을 온전히 잘 살아낼 수 있기를 바라본다.
작성: 허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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