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에는 확실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는 데가 있다. 우리 사회가 개인주의 사회고 능력주의와 경쟁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경쟁이라는 것에는 정말 잔인한 데가 있는데, 내가 최선을 다해 내 능력을 발휘하는 그 순간 나는 누군가를 짓밟고 서 있다는 점이다. 내가 이긴다는 것은 의도했건 아니건 누군가를 이긴다는 뜻이며, 결국 그 누군가를 패배자나 실패자로 만든다는 뜻이다.
이 경쟁은 거의 인생 내내 체화되어서, 학창 시절 때부터 매번 내 위치를 누구에게 이겼고, 누구에게 졌는지로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등수나 학점이 상징하는 ‘이기고 졌다’는 이 은유는 사실 ‘이겨서 죽였고, 져서 죽었다’라는 진실 같은 것에 뿌리내리고 있기도 하다.
내가 합격하고 누군가는 불합격하고, 내가 10등 하고 누군가는 100등 하고, 내 주식이 오르고 누구는 내려가고, 내 아파트가 대박 나고 누구는 평생 내 집 마련조차 물 건너가는 이 사회의 희비라는 것은, 결국 나의 기쁨이 누군가에 대한 살해에 뿌리내릴 수밖에 없다는 걸 말해준다.
〈오징어 게임〉은 그처럼 우리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익숙하게 살아가고, 이미 살아온 삶을 그냥 더 솔직하게 보여줄 뿐이다. 때론 윈윈을 하자고 협력하지만, 결국 협력해서 누군가를 짓밟는 게 이 사회의 법칙이다. 내 사업이 대박나려면 누군가의 사업은 쪽박을 차야 한다. 내가 승승장구하려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듯 망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때로는 같은 편이었던 그 누군가가 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모두’를 위한 룰의 ‘공평함’이 아니라, ‘나’를 위한 룰의 ‘공평함’을 계속 주장하고, 믿고, 합리화해야 한다.
오늘 우리의 기쁨을 이루는 것들, 성공한 진학, 취업, 합격, 투자 성공, 그리고 내가 누리는 몇십만 원짜리 풍경, 몇백만 원짜리 가방, 몇 천만원짜리 자동차, 몇 억짜리 아파트, 이런 것 모두는 나의 이김, 승리, 생존의 결과임과 동시에 그 누군가의 패배, 실패, 죽음의 결과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레벨에서의 경쟁이든 집단적인 차원에서의 경쟁이든, 우리가 그런 끝없는 경쟁 위에 자리 잡았다는 걸 잊을 때가 많다. 사실 다 알면서 또 잊고, 또 잊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인간이란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인 것 같다. 자기 자신은 선량하다고 믿어야 하고, 내 삶에 그 누군가의 희생은 없다고 합리화해야 하고, 내가 누리는 것들의 이면에 있는 이들은 잊어야 한다. 그러다가 〈오징어 게임〉 같은 작품을 보면, 이상하게 빠져들면서 무언가 강렬한 공감을 느끼지만, 다시 돌아서서는 또 망각의 삶을 살아낸다. 인간 삶의 조건이란 그 직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아무리 마음 아프고, 안타깝고, 괴로워도, 결국에는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다. 내 가족을 위해, 내 팀을 위해, 내 나라를 위해, 다른 가족, 다른 팀, 다른 집단을 죽이는 것이 우리 삶이 언제나 놓여 있는 운명인 것이다. 다만 그저 어떤 마음이 그런 현실을 조금이나마 완화할 수 있도록 애쓰는 정도가 아마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상생이나 윈윈, 그래도 나눔이나 함께 살아감의 여지가 있다면, 그 여지를 완전히 놓치는 않고 살아가고자 애쓰는 것이다. 그 애씀이 그나마 나를 덜 기만적으로 만들어줄 것이라 믿으면서 다시, 그것이 나에게 조금은 어떤 인간다움을 회복시켜줄 거라 믿으면서 그렇게 조금, 애쓰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삶에는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닌 측면이 있다는 걸 믿으면서 말이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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