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 〈퀸스 갬빗〉이 나오자마자 봤다. 체스를 아주 좋아하는 남편이 먼저 보고 나서 추천을 했다. 재미있긴 했지만 ‘올해의 드라마’ 정도는 아니었다. 이 작품의 성공은 여자 주인공(베스 하먼 역)의 공이 90%이고, ‘미국’에서 ‘60년대’에 ‘여자’가 체스로 성공한다는 점이 사실상 판타지에 가까운 내용이나, 그 판타지를 뒷받침할 강력한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게 내 한 줄 감상평이다.
그런데 반대로 남편이 이 드라마를 좋게 본 것도 디테일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디테일은 체스판 위의 말 포지션이다. 어지간한 체스 소재 영화를 다 본 그도, 〈퀸스 갬빗〉에서처럼 체스판이 등장하는 모든 씬에서 말이 앞뒤가 맞게, 그러면서도 복잡하게 놓인 경우는 거의 못 봤다고 한다. 체스 팬 커뮤니티에선 〈퀸스 갬빗〉의 체스판 씬을 일일이 캡쳐해 그게 역사상 어떤 경기에서 실제로 나온 경우인지, 그 뒤의 움직임은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지 토론이 벌어진다고 한다.
반대로 말하면 지금까지 체스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말 배치가 엉터리인 적이 많았다는 얘기다. 아예 체스판부터 틀리게 놓인 장면도 흔했다고 한다. 체스판은 밝은색 네모 칸이 아랫줄 오른쪽에 가게 놓는데(light on right), 그것부터 잘못된 장면이 많단다(이 지점에서 〈응답하라 1988〉의 박보검이 바둑 기사 이창호를 모델로 연기를 하며 바둑알 잡는 손가락 포지션부터 연습했다던 게 떠오른다).
그럼 〈퀸스 갬빗〉은 어떻게 그 많은 체스 경기 장면마다 복잡하고도 정확한 말 배치를 했을까. 조언해준 사람이 있었다. 러시아의 가리 카스파로프. 1985년부터 1999년까지 세계 체스 챔피언이었던 사람. 1996년 인공지능 딥 블루와의 체스 경기에서 이긴 최초의 인간. 1963년생이니까 현재 57세다.
드라마에서 하먼과 라이벌로 나오는 ‘그 러시아인(보르고프)’ 역할을 원래 카스파로프가 제안받았었다고 한다. 근데 카스파로프가 사는 게 너무 바빠서 드라마 출연을 위해 스케줄 3개월을 비우는 게 불가능하다며 거절했다. 대신 체스 장면 관련해 조언해주기로 했고, 덕분에 완성도가 확 올라간 거다.
미국인이 결국 러시아 체스 챔피언을 이긴다는 설정이, 감동적이긴 하지만 판타지라는 것은 1886년 이후 역대 세계 체스 챔피언 리스트를 보면 알 수 있다. 공식 세계 챔피언 리스트에 올라 있는 미국인은 딱 둘이다. 19세기 말에 빌헬름 슈타이니츠라는, 원래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나중에 미국에 귀화한 사람이 있었고, 다른 하나가 그 유명한 보비 피셔다.
미국이 전국적으로 수많은 체스 클럽을 갖추고 돈과 노력을 쏟아부어도 체스에서 죽을 쑤었는데, 1972년에 드디어 보비 피셔가 소련 상대를 누르고 세계 1위에 오르자 전쟁에서 이긴 것처럼 난리가 났다. 체스판 위에서 벌어진 냉전이었던 셈이다.
미국의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보비 피셔가 몇 년 더 챔피언을 하다가 그 뒤를 잇는 미국인 챔피언이 줄줄이 나오는 거였겠지만, 현실은 달랐다. 보비 피셔는 1972년 아이슬란드에서 열렸던 챔피언 결승전 승리 이후 갑자기 잠적하고 경기를 피했다. 당시 아이슬란드가 중립국 입장에서 미국과 소련의 결승전을 주최했는데, 여기서 소련 선수에 대한 대우가 아주 엉망이었다고 한다.
보비 피셔가 제아무리 천재적 선수였다 해도, 그의 승리가 소련에 적대적인 분위기에 빚진 면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관례대로라면 보비 피셔는 챔피언 타이틀 유지를 위해 이 소련 선수와 몇 번 더 경기해야 했다. 한데 이 엄중한 시기에 소련에 가서 경기하다 뭔 일 당할까 걱정이 된 건지 어쨌는지 모든 경기를 사실상 거부하고 숨어버렸다. 나중엔 정신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도 돌았다.
경기에 나서지 않는 반쪽짜리 챔피언 타이틀은 곧 끝나버렸고, 이후 다시 쭉 소련 – 러시아에서 챔피언이 나온다. 미국은 얼마나 애가 탔을까. 보비 피셔 이후 미국의 체스 붐은 영화 〈위대한 승부(Searching for Bobby Fischer)〉, 영어 원제로 ‘보비 피셔를 찾아서’에 잘 묘사돼 있다. 제목이 중의적이다. 실제로 보비 피셔가 사라지기도 했고, 차세대 보비 피셔를 찾거나 기르려는 미국의 의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체스 역사상 여자 세계 챔피언은 나온 적이 없다. 지금까지 최고의 여자 체스 선수는 헝가리 출신 유디트 폴가르. 1976년생으로, 15살이던 1991년에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다. 체스 하는 언니들 어깨너머로 배우다가 세계 최강의 위치에 오른 딸 셋 중 막내. 본인이 세계 챔피언이 되진 못했지만, 역대 남자 세계 챔피언들을 두루 이겨본 유일한 여자 선수.
가스파로프도 이긴 적이 있다는 점에서 〈퀸스 갬빗〉 하먼의 실제 모델이 유디트 폴가르였을 거라는 추측이 가장 그럴듯하다. 그런데 유디트 폴가르는 미국인이 아니지 않나. 그리고 〈퀸스 갬빗〉의 원작 소설이 나왔을 때(1983년) 폴가르는 알려지지도 않았다. 넷플릭스가 이 소설을 드라마화하는 과정에서 폴가르 캐릭터를 참고했을 수는 있겠다.
다른 선수를 보자. 유명한 미국인 여자 체스 선수 제니퍼 샤하데. 1980년생 그랜드 마스터, 미국 여자 챔피언 자리에 두 차례 오른 사람. 샤하데가 체스 관련해 쓴 책이 몇 권 있는데, 그중 두 권의 제목은 이렇다. 〈Chess Bitch〉, 〈Play like a girl〉. 제목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이 남자들이 장악한 체스 세계에서 여자 선수로 활동한다는 게 어떤 건지에 대해 쓴 책이다.
샤하데 인터뷰를 보면,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체스계에서 성별 때문에 소외되며 받은 스트레스가 컸나 보다. 경기 사이 쉬는 시간, 끝나고 밥 먹고 술 마실 때, 편하게 얘기 나눌 동성의 동료가 없어 힘들었던 것 같다. 〈퀸스 갬빗〉에서 하먼이 처음 근처 고등학교 체스반 학생들과 만나 경기하러 갔을 때 남학생들이 우르르 들어오면서 하먼을 위아래로 무시하듯 쳐다보던 장면과 겹친다.
그뿐인가. 실력을 알기도 전에 여자랑은 경기 안 한다는 으름장, 일부러 경기에 지각하거나 경기 중 이상한 짓을 하면서 신경을 긁는 상대… 대회에 나가서 늘상 그런 일을 겪는 건 상당한 압박이었을 거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샤하데뿐이 아니다. 미국-캐나다 국적의 다른 유명한 여자 체스 선수인 알렉산드라 보테즈(1995년생)도 있다. 보테즈는 체스 관련 온라인 스트리밍도 활발하게 하는데, 거기서 자신이 체스 하면서 겪은 성희롱과 남자 선수들의 텃세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허우 이판은 1994년생이고, 14살 때 여자 세계 최연소 그랜드마스터 타이틀을 따냈다. 허우 이판의 특징은 의도적으로 남자들과 경기를 많이 한다는 점이다. 실력이 뛰어나도 여자 선수들은 여자들끼리 경기를 많이 한다. 원해서이기도 하고, 주최 측에 의해 경기가 그렇게 짜이기도 한다. 허우 이판은 그래서는 실력이 늘 수가 없다며 여자들끼리의 경기를 일부러 피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여자 세계 챔피언이었지만 더 이상 여자들끼리만 하는 경기는 못 하겠다며 불참해 타이틀을 잃기도 했다.
허우 이판이 인터뷰에서 남녀의 체스 플레이 차이에 대해 언급한 내용도 흥미롭다. 남자 선수는 전체 흐름을 조망하고 여자 선수는 당장 해결해야 할 눈앞의 특정 문제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결론 지은 건 아니고 앞으로 계속 고민해 볼 문제라고 말했다. 허우 이판은 또 뛰어난 여자 선수가 적은 이유를 몇 가지 대면서, 그중 하나로 체스라는 게임의 특성 자체가 남자에게 유리하도록 짜여 있다는 것, 또 다른 하나로 신체적 조건 차이를 들었다.
〈퀸스 갬빗〉에서도 나왔지만 체스라는 게 안 풀리면 몇 시간이고 한정 없이 이어지는 게임이다. 여러 시간을 앉아서 버텨야 하는 체력 조건에서 여성이 불리하다는 거다. 남녀의 타고난 차이를 인정하되, 그 판에서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 불리해 보이는 조건에서도 남자랑 더 많이 붙겠다는 태도는, 좀 새로운 것이다. 아쉽게도 허우 이판은 지금은 경기를 거의 하지 않고 후진 양성(?)에 힘쓴다. 원래 체스를 커리어로 생각한 적이 없고 즐기기 위해 했다고 한다.
사실 새롭기로 치자면 뺄 수 없는 인물이 2013년 이후 지금까지 세계 챔피언을 차지하는 1990년생 노르웨이인 망누스 칼센이다. 칼센 본인이 한 인터뷰에서 ‘노르웨이에 내세울 게 하나도 없는데 내가 체스 챔피언이 되는 바람에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엄청 좋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재밌는 건 망누스 칼센 역시 체스 하는 세 누나들 옆에서 처음 장난처럼 체스를 배우다가 누나를 제치고 세계도 제쳐버린 케이스라는 점. 딸 셋 중 막내 유디트 폴가르처럼 말이다. ‘준비 하나도 안 하고 친구 따라 아나운서 시험 보러 갔다가 덜컥 붙었어요’라던 어느 아나운서 스토리는 들어봤지만 이건 체스 세계 챔피언인데? ‘어깨너머로 배우는 둘째 이론’ 같은 새로운 이론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물론 싹수는 보였다. 칼센은 두 살 때 50조각 퍼즐을 맞추고, 네 살 때 10–14세용 레고를 조립했다고 한다. 드물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대단한 천재 기질은 아니다. 아마추어 체스 선수인 칼센의 아버지가 칼센이 5살 때 처음 체스를 가르쳤는데, 이때는 별 관심을 안 보였단다. 근데 제대로 체스를 하게 된 계기가 누나들을 이기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고. 인간의 질투심은, 그중에서도 형제자매 사이의 질투심은 과연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궁금하다.
망누스 칼센은 축구도 아주 수준급이다. 앞선 세대 체스 챔피언들처럼 학교도 안 가고 죽자고 체스만 파고든 게 아니다. 플레이 방식도 독특하다. 몇 시간이고 지루하게 주거니 받거니 해서 상대 힘을 빼놓았다가 상대가 아주 약간의 허점을 드러내는 바로 그 순간에 훅 들어가는 스타일이다.
제한된 시간이 짧은, 숙고할 여지 없이 본능에 의존해야 하는 게임에선 망누스를 따라올 자가 현재는 없다. 이세돌은 바둑은 잘해도 경제 관념은 별로 없는 것 같던데, 망누스는 사업가 기질도 다분하다. 온라인 스트리밍, 해설, 교육 관련해 사업을 하는데, 좀 뜬다 하는 체스 앱은 망누스가 다 사들여서 키운다.
간단한 게임 같은데 알수록 오묘한 게 체스다. 종주국이랄 건 없어도 기원이 인도라는데, 왜 인도에선 선수들이 어릴 때 천재 기질을 보이다가 10대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소리 없이 사라지는 걸까. 왜 다른 거 다 잘하는 미국에서 체스 챔피언이 안 나올까(현재 미국 내 선수 랭킹을 보면 최상위는 순수(?) 미국인이 아니고 이탈리아, 필리핀, 일본 등에서 귀화한 사람들이다). 최상위권 여자 선수가 부족한 이유는 뭘까(공급 풀이 크면 최고 레벨도 결과적으로 많이 나온다는 건 체스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증명된 거지만, 애초에 왜 남자들이 체스를 많이 하는가).
다시 〈퀸스 갬빗〉으로 돌아가 보자. 주인공 하먼의 캐릭터는 그러니까 어느 한 체스 선수에서 나온 게 아니고, 유디트 폴가르(세계 챔피언을 이긴 여자) + 보비 피셔(두려움, 정신적 문제) + 제니퍼 샤하데와 허우 이판(남성 위주의 체스계에 문제 제기) 등을 다 합쳐 버무린 것이다.
대중에 체스 붐을 일으키는 이 드라마가 좀 아쉬웠던 표면적 이유는 남자 배우들 때문이다. 카우보이모자 쓰고 나오는 베니 와츠 역(토마스 브로디 생스터. 〈러브 액추얼리〉 이후 업데이트가 안 된 것 같다), 그리고 하먼이 좋아하는 기자 타운스 역(제이콥 포춘 로이드. 여자 주인공의 매력에 비해 힘이 많이 떨어진다). 이 둘 때문에 드라마 몰입이 안 됐다.
다른 이유. 내가 만들었다면 〈퀸즈 갬빗〉에서 중독과 정신적 문제를 좀 더 깊이 파고들었을 것이다. 체스에서도 약물 이슈가 없었던 건 아니다. 다른 스포츠처럼 신체 능력이 핵심적인 건 아니지만, 체스에서 기억력과 집중력은 결정적 요소다. 그래서 주요 경기에선 선수들이 마시는 커피를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 적이 있다.
하먼과 친엄마의 관계, 하먼이 약물과 술 앞에서 그렇게 약했던 이유, 그 정도의 깊은 중독에서 빠져나오게 만든 강력한 추진체는 뭐였는지 충분히 다뤄지지 않아 아쉽다. 에피소드를 두세 개 늘리더라도 이런 부분에 대한 얘기가 더 깊이 나왔더라면, 남들은 몰라도 나는 더 재밌게 봤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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