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장편 애니메이션을 보기 시작한 건 다섯 살 무렵부터였다. <로보카 폴리>나 <출동! 슈퍼윙스> 같이 보통 15분 안쪽에서 끝나는 짧은 애니메이션만 보던 아이가 긴 스토리를 집중력 있게 볼 수 있을지 살짝 걱정했으나, 기우였다.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아이들은 긴 플롯도 무리 없이 소화한다.
게다가 디즈니 영화다. 이 무서운 회사는 대부분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아이들이 더 어릴 때부터 대강의 스토리를 스스로 학습할 수 있도록 수많은 유아용 책으로 미리 깔아 두었다. 자기 전 읽어주려고 아이들에게 사준 동화책들이 디즈니 콘텐츠를 학습하기 위한 예습용 교재(!)로 활용되었던 셈이다.
아이가 서너 살 때 사준 동화책들 중에 <피터팬>과 <정글북>도 있었다. 열 페이지가 채 안 되는 얇디얇은 책인 데다 글자도 몇 글자 안 됐다. 게으른 아빠가 읽어주긴 딱 좋은 책이어서 종종 그 책을 집어 머리맡에서 아이에게 읽어줬다. 물론, 음악으로 치면 프레스토 비바체 정도의 빠른 속도로.
한창 공룡에 미쳐있던 시절이었다. 졸린 책 읽기 시간에 그나마 동물이 나오는 <정글북>은 어느새 아들의 최애 동화가 되었다. (똑같은 동물이 나와도 <덤보>보다는 표범과 곰, 호랑이가 나오는 <정글북> 쪽이 훨씬 빨리 닳아버린 것은 아들이기 때문인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분명 학교 다닐 때 성 역할은 사회적 요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건만)
그러던 와중에 거실에서 넷플릭스를 돌려보다 아이에게 그만 딱 <정글북>을 들키고 말았다. 책에서만 보던 빨간 팬티 모글리가 살아서 움직이는 애니메이션 영화. 덕분에 아이는 신나게 한 시간 반 가량을 모글리와 발루, 바기라와 함께 보냈고, 나는 내 소중한 휴식시간을 몽땅 1967년에 나온 총천연색 컬러의 고전 애니메이션을 보는 데 쏟아붓게 되었다. (아, 밀려있는 볼거리가 얼마나 많은데 엉엉)
그런데 말이다. 나온 지 50년이 넘은 이 오래된 영화를 거듭 보다 보니 미처 생각 못 했던 점이 눈에 띈다. 인간의 아이인 모글리가 밀림에서 10여 년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흑표범 바기라 때문이었다.
바구니 안에 있는 모글리를 처음 발견한 것도, 모글리가 젖을 먹을 수 있도록 새끼가 있는 늑대 부부에게 위탁한 것도, 시어 칸의 위협으로부터 모글리를 구하기 위해 인간 세상으로 다시 인도하는 것도 모두 바기라였던 것이다. 바기라는, 사실상 모글리의 아빠와 다름없었다. 다만 낳지 않았을 뿐.
자신이 구한 아이가 잘 성장하기를 바라며 십 년을 옆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마음, 그것을 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을까. 다른 종의 아이가 밀림이라는 공간 속에서 차별받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하려는 마음, 매 순간 들이닥치는 위협으로부터 아이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 부모의 마음 아니고선 다른 표현을 떠올리기 어려운 그 모습을. (인간 세상으로 가야 한다고 모글리를 설득하다 모글리의 발차기를 맞고 폭발하는 바기라를 보며, 제때 밥 먹으라고 사정사정하다 결국 폭발하는 내 모습을 본다. 나도 바기라처럼 시원하게 한 마디 하고 싶은데. “어리석은 녀석…!”)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는 여정 와중에 모글리는 또 다른 동물 친구를 만난다. 느림보 곰 발루. 발루는 자신을 위하긴 하지만 때론 엄격한 모습을 보이는 바기라와는 달리, 허허실실 능글맞다. 바기라에게 발루는 그저 ‘미련한 주책바가지 정글의 건달’이지만, 모글리에게 발루는 모든 것을 똑 부러지게 가르치고자 하는 바기라와 달리 자신의 마음을 푸근하게 받아주는 또 다른 아빠의 모습이다.
모두가 욕심 버리면 그 모든 게 즐거워. 걱정과 근심 떨쳐 버려요.
발루는 이렇게 노래 부른다. <정글북>의 주제곡인 ‘The Bare Necessities’. 시어 칸이니 인간 세상이니 하는 걱정과 근심을 모두 버리고 지금 이 순간 행복하게 살자는 발루의 마음 또한 부모의 마음이다. 내가 다 지켜줄 테니, 아무 걱정 없이 같이 재미있게 살자고.
뱀과, 독수리와, 원숭이와, 호랑이 시어칸마저 이겨내고 바기라와 발루, 모글리는 인간 마을 코앞까지 내려온다. 모글리는 바기라와 발루는 금세 잊은 채 또래 소녀가 부르는 노래에 홀려 소녀에게 다가가고, 함께 마을로 떠나버리고 만다. 천진난만하게 소녀의 물동이를 들어주는 모글리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아니 바기라와 발루가 저 여기까지 데려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바기라는 어서 인간세상으로 가라고 하고, 발루는 어서 밀림으로 돌아오라 한다. 떠나는 모글리의 등을 바라보며 못내 아쉬워하는 발루에게 쿨한 바기라는 ‘다 자연의 섭리라 어쩔 수 없다’ 위안하고, 둘은 다시 밀림 속으로 돌아선다. 자연의 섭리라.
부모는 언젠가 자식들을 떠나보낸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바기라처럼 나중을 위해 올곧게 아이를 기르고도 싶고, 발루처럼 걱정이랑 다 잊어버리고 함께 신나게 이 순간을 즐기며 보내고 싶은 두 가지 마음이 시시때때로 오락가락한다. 마치 모글리를 두고 티격태격하는 발루와 바기라처럼. 어느 한쪽은 맞고 한쪽은 다르다고 하기보단,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 바기라가 되어야 할 때도 있고, 발루가 되어야 할 때도 있겠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기라도, 발루도 모글리에겐 똑같이 필요한 존재였다는 점이겠지. 밀림을 헤치고 스스로 인간 세상으로 걸어 나갈 때까지 든든히 그를 지켜주었던 존재들.
아이는 이제 더 자라서 한 시간 반이 넘는 실사영화 <정글북(2016)>도 잘 본다. 호랑이랑 표범이 만화보다 더 실감 난단다. 만화에는 조금 나왔던 모글리의 멋진 늑대 아빠와 엄마도 나와서 좋단다.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속담을 이렇게 잘 구현한 영화가 또 있을까 싶다. 동물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여주니, 동물과 공생하는 마음가짐을 가르치는 데도 좋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나는 또 이렇게 영화 한 편을 틀어 아이와 함께 본다. 바기라의 마음과 발루의 마음을 동시에 지닌 채. 말이야 습관처럼 집에서 애보기 고생스럽다 하지만, 학교까지 멈추게 만든 코로나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할지도. 아이와 이렇게 영화 보며 함께 뒹굴거리는 이 시간들이 그저 더없이 좋으니 말이다.
원문: 자민의 브런치
이 필자의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