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본 사람 중 몇몇은 〈배틀로얄〉(2000)을 떠올리며 너무 비슷하다고 할 것이고, 그다음으로는 〈신이 말하는 대로〉(2014), 〈도박묵시록 카이지〉(2009), 〈라이어 게임〉(2007–2010), 〈컨뎀드〉(2007), 〈레디 오어 낫〉(2019), 〈더 벨코 익스페리먼트〉(2016), 〈이스케이프 룸〉(2017)… 심지어 러시아 영화 〈마피아: 생존게임〉(2016)을 떠올릴 수도 있다. 나보다 기억력이 좋은 분이라면 아마도 2배 이상의 비슷한 작품을 읊을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에도 이런 영화는 있었으니까. 간단히 말해, 이런 서바이벌-데스 게임 영화는 아주 많다는 말이다.
따라서 ‘오징어 게임’이 다른 어떤 영화와 설정이 비슷하다거나 그래서 표절이 아니냐는 평은 이런 장르의 영화들에겐 좀 쓸데없는 소리다. 그게 이 장르의 플롯 규칙인데 비슷한 게 당연하지. 예를 들어 외지고 낯선 곳에 놀러 간 대여섯 명의 젊은이, 특히 거기서 섹슈얼한 짓거릴 한 커플은 첫 빠따로 반드시 난도질을 당하는 슬래셔 무비를 보고 다른 작품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셈이다.
또 달리 말하자면, 이 장르의 영화는 그 동일한 설정 안에서 얼마나 새로운 디테일을 변주하는가가 관건이지, 장르의 공식을 완전히 깨는 게 목적이 아니다. 살짝살짝 뒤트는 정도가 창조적인 것이다. 이 장르 영화의 설정, 구조, 플롯은.
간혹 자신이 본 몇 개의 동일 장르 영화를 거론하며 이렇게 카피한 작품을 어떻게 좋아할 수 있냐고 화를 내듯이 이 영화를 필요 이상 까는 분들을 볼 수 있는데, 그런 분들을 보면 조금 민망하다. 거울에다 욕하는 사람을 보는 것 같아서 좀… 맘이 안 좋기 때문이다. 모를 수는 있는데 폭력적일 정도로 심하게 욕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취향 때문에 싫어하는 거야 얼마든지 오케이지만, 카피라고 욕하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 그건 마치 EDM 음악에서 ‘Intro – Break Down – VerseBuild Up – Drop – Break Down’으로 이어지는 기본 구조의 동일성을 두고 카피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장르는 원래 이런 설정과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영화들은 대부분 그런 설정 속에 이런 플롯을 가지고 있다. 제한된 공간이나 상황에 갇힌 주인공이 남을 죽이거나 속이지 않으면 내가 죽거나 속는 상황에서, 현실과는 달리 더 많이, 더 잘 죽이거나 속인 사람이 오히려 더 큰 보상을 받게 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고 있는가?’란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그리고 이런 영화들은 당연하게도 공평한 기회를 가장했지만, 엄연히 불평등한 출발점이나 제한된 기회에서 오는 빈부격차와 갈수록 더 치열해지는 생존경쟁 속에서, 법률과 제도가 가둔 인간의 원시성이 폭발하는 순간의 본능적 쾌감과 자신도 사실 피해자에 다름 아니라는 공포, 그리고 비슷한 피해자들에 대한 연민과 연대의식을 갖게 한다. 자극적인 설정 때문에 욕을 할지언정, 주목할 수밖에 없는 소재인 것이다. 엄청 과장되었을지언정, 그게 현실이니까. 간단히 말해, 사는 게 너무 힘드니까 이런 영화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은 총 9화다. 1–2화는 흥미롭게 지나간다. 3화부터 서서히 지루해지더니, 4–5화까지 계속 지루했다. 그만 볼까… 하다가… 6화에서 갑자기 드라마가 부스트 업 되더니, 이후로 급발진해서 9화까지 죽 내달린다. 이해하기 힘든 것은 8화의 러닝타임이다. 나머지는 모두 최소 52분에서 최대 62분 내외인데 8화만 32분이다. 할 수만 있었다면 이리저리 좀 압축해서 총 7화 정도로 줄였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하지만 나름의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겠지.
재밌는 포인트는 누가 뭐래도 세트이다. 메이킹을 보고 싶다. 페인트칠한 벽이 조명에 울룩불룩 번들거리는 것만 빼면 한국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색감과 스케일과 디테일이 마음에 든다. 단지 에셔의 계단을 차용한 계단 세트는 일부러 좁은 곳에 꽉 찬 사람들의 이미지를 추구했을 수도 있겠지만(감독은 오르내리는 전체가 한 프레임 안에 잡히길 원했을 것 같다), 추격전을 하기엔 많이 좁아 보였다. 차라리 시간에 따라 점점 폭이 좁아지거나 연결되어 보이던 계단이 특정 구간에서는 끊어지는 등의 착시를 이용해 추격자들을 추락시키는 등의 조금 더 흥미롭고 디테일한 설정이 있었다면 에셔의 계단을 단순 차용하기만 한 수준을 넘어설 수 있어서 더 좋았을 것 같다.
개인 취향으로는 시즌 2에서는 가면의 세모, 네모, 동그라미에 부디 불이 켜졌으면 좋겠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그 불만 켜진 모습. 또는 세모였다가 툭툭 치니 네모로 바뀌는 등의 재밌는 설정들이 들어갔으면 좋겠다. 참, 그들이 머무는 수면실 같은 곳의 벽에 다음 게임의 벽화가 그려진 깨알 같은 디테일은 맘에 들었다.
눈길이 가는 배우는 서울대 출신 상우 역의 박해수 씨와 탈북자 새벽 역의 정호연 씨다. 정호연 씨는 부산행에서 공유 씨의 딸로 나온 김수안 씨의 친누나 같은 느낌이다. 첫 연기로 알고 있는데, 연기력이라기엔 아직 너무 단선적이고 감정의 레이어가 다층적이지 못하지만(죄송) 엄청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연기는 하면 늘 수 있지만 타고난 눈빛은 어떻게 해도 안 되는데, 그는 정말 멋진 눈빛을 갖고 있다. 앞으로 더욱 잘 될 것이다.
상우 역의 박해수 씨는 이 어려운 역을 관객에게 잘 설득해 내는 데 성공했다. (연기자라면 탐이 날 수밖에 없는 캐릭터이다. 특히 라스트는 좋았다.) 프레임 안에 잡혔을 때 존재감이 확실하고 신뢰감이 간다. 앞으로 더 많은 감독의 러브콜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엄청난 스포일러
말할 수 없는 특정 배우는 가면을 쓰고 있어도 누군지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엔 특히 그의 영어 대사와 걸음걸이에서 확신했다. 그는 호흡을 많이 담아서 한숨을 내뱉듯이 대사를 하는 특유의 발성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걸을 때 한쪽 다리가 살짝 불편한 것을 감추듯이 빠르게 다음 발걸음으로 옮기며 턴을 하는 특징이 있다. 실제로 그의 다리에 어떤 불편함이 있는지야… 제가 모르지용. ㅎ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제일 마음에 든 부분은 이정재와… 스포일러라 말할 수 없는 그 누구의 대비였다. 둘 다 똑같이 최후까지 살아남았지만, 하나는 선한 쪽에, 하나는 악한 쪽에 있게 된 그 둘의 대비 구조가 이 영화의 핵심이며, 그 둘을 움직인, 스포일러라 말할 수 없는 또 다른 그 누구는 결국 신의 죽음을, 대비되는 그 둘은 결국 천사와 악마를 상징하는 그 시나리오 구조 자체가 제일 맘에 들었다.
어찌 보면 스타워즈의 구조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프론트 맨이 다스베이다인 셈이다. 그렇기에 중간중간 기도하는 장면, 성경을 은유한 듯한 설정, 돌아온 이정재 앞의 십자가 장면 등이 나온 거겠지. 만약 시즌 2가 나온다면 더욱 분명하게 선과 악의 전투가 펼쳐질 것이다. 따라서 이 오징어 게임은 단순한 서바이벌 게임이 아니라 우주와 종교, 인간사 전체까지 담아내려는 야심의 씨앗이 이미 시즌1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넷플릭스가 아니었다면 나오기 힘들었을 작품이다. 일단 그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고 하는데 나는 호다. 〈도가니〉를 감독하고, 〈수상한 그녀〉를 감독하더니, 갑자기 류이치 사카모토를 초빙한 〈남한산성〉을 감독하고, 이어서는 이런 작품을 만드니,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모를 황동혁 감독의 다음 작품이 뭘지 정말 기대된다.
정말 마지막으로… 감독의 말은 어쩌면 4화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나 서로 죽이는 상황 속에서 001번 할아버지가 외치는 이 대사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제발 그만해. 나 무서워. 이러다가는 다 죽어!
이 대사의 행간에는 이런 말들이 있는 것이다.
제발 그만해! 이렇게 부동산 가격이 오르다가는 다 죽어! 누구는 밥을 못 먹어서 죽는데 누구는 너무 먹어서 죽어! 다들 남이야 어찌 되건 앞만 보고 달려가다간 우린 다 죽어! 이 천민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결국 우린 모두 을이야! 나 무서워. 이러다가는 다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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