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의 실패란 주로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독 잔인한 데가 있다. 모든 일들에 대해 사회가 상당히 엄격한 스케쥴려를 갖고 있고, 그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패배자’라는 낙인이 찍힌다. 대학 입학을 위한 나이, 취업이나 신입사원에 적절한 나이,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아야 하는 나이, 아파트를 사거나 골프를 쳐아하는 나이 같은 것들이 꽤나 광범위하게 암묵적인 룰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룰 또는 사회적 시간표는 개개인들에게 유달리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 뒤처지고 있다는 강박이나 도태되었다는 기분을 심화시킨다. 아이들은 숫자를 배우기 시작한 나이부터 형이나 누나, 동생을 구별하는 법을 익힌다. 나이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즉 사회관계에서 절대적인 무언가라는 것을 미리부터 알기 시작한다. 나이에 따른 존댓말과 서열을 익히며 누구 말을 들어야 하고, 누가 리더가 되어야 하는지를 배우면서 ‘나이’와 ‘시간’에 스며든 권력을 익힌다.
시간이 곧 권력이라는 뜻은 달리 말하면, 그 시간을 온전히 따라가지 못하면 권력을 잃는다는 뜻도 된다. 처음에는 나이만 먹으면 권력을 얻지만, 동시에 이 ‘시간 권력’은 그때그때의 통과의례들을 요구한다. 가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정해진 기차에 계속 올라탈 것을 요구한다. 그러다 한 번 놓치고, 두 번 놓치기 시작하면 그는 나잇살만 먹은 존재가 된다. 사회는 그가 자신의 시간을 따라오지 못한 패배자라고 규정하기 시작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매우 이상한 개념이다. 사람마다 신체 나이에는 차이가 있다. 누군가는 신체적으로나 체력적으로 빨리 늙기도 하며, 천천히 늙기도 한다. 신체 나이뿐만 아니라 정신이나 마음의 나이에도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나이가 들어도 젊을 때와 같은 활력과 에너지를 유지하지만,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 그런 무수한 차이들을 무시해버린 채 사회가 만든 시간 개념을 개개인들에게 강요하는 순간, 이것은 대단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사회가 실패에 잔인한 사회라곤 하지만, ‘실패’의 개념에서 ‘시간’만 빼더라도 덜 잔인한 사회가 될 거라 생각한다. 삼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가도 이상한 나이에 들어온 게 아니라는 인식, 취업이나 결혼을 늦게 하더라도 정상성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는 사고방식, 몇 년 정도는 소위 실패를 하더라도 허송세월한 게 아니라는 당연한 상식 같은 것들이 널리 통용된다면 실패도 그리 무서워할 게 아닐 것이다.
모든 삶에는 각자의 시간이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조금 빨리 자기 길을 찾고, 조금 늦게 찾는다. 누군가는 조금 오래 걸려서 능숙해지고, 누군가는 빨리 적응하기도 한다. 사회는 그 모든 것을 일률적이고 폭력적으로 분류하는 심판관이 될 게 아니라, 다양한 시간들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무대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하는 문화라는 것도 다양한 시간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이야기들로 채워져야 할 것이다.
원문: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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