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마다 새해의 계획을 세워왔다. 하지만 계획대로 실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연말이 되어 이룬 게 없는 계획표를 들여다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계획을 세울 게 아니라, 차라리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리스트를 만드는 게 낫겠다.
해야 할 것들은 지키기 어렵지만,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지키는 건 그래도 할만하지 않을까란 생각이었다. 보통 하지 말아야 할 리스트에는 이미 해보고 좋지 않았던 것들, 하고 후회하고 몸소 느끼는 것들이 들어있다. 그래서 더 조심하게 된다. 몇 년 전부터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경계를 대충 그어 두고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올해 그어 놓은 경계는 몇 가지가 있다. 일에 있어서는 총 3가지 정도가 있다.
- 업무에서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기
- 계획 없이 일을 바로 시작하지 않기
- 끝난 프로젝트는 그때 바로 복기해 보기
사적인 것들에는 이런 게 있다.
- 식사 시간을 넘기지 않기
- 아이들에게 화내지 않기
- 눈 아플 때까지 스마트폰 들여다보지 않기
하지만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4분의 1이 지난 지금,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거나 가끔은 넘어가는 일들도 간혹 있다. 그래도 이 경계를 머릿속에 담아두지 않았다면 하나도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2.
브랜드 가이드라인에도 이렇게 브랜드가 주의해할 지침을 규정한 목차가 있다. 브랜드 사용 시 실수하기 쉬운 색상이나 형태의 변형이 없도록 금지하는 규정이다.
사실 브랜드 규정을 충실히 따른다면 쉽게 발생하지 않을 것들이긴 하다. 하지만 규정을 만들어 놓는 것과 없는 것의 느낌 차이는 꽤나 크다. 브랜드 가이드라인의 역할은 어떤 행위를 권장하는 것도 있지만, 하지 않도록 막고 강제하는 역할도 있기 때문이다. 이 인식을 강화하고 가이드라인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있다. 최근에는 이와는 다르게 친절한 해설서 같은 가이드라인이 대세를 이루긴 하지만, 엄격한 경고를 통해 브랜드 이미지 손상이 가는 걸 미리 차단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건 여전히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넓게 보면 브랜드 가이드라인뿐 아니라 브랜드 정체성 측면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나의 정체성을 정의 내리고 규정하는 일은 사실 나를 한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할 수는 있는 일이라도 나의 정체성에 혼란을 주는 일이라면 하지 않을 때도 있다.
3.
우리나라 힙한씬의 1세대격인 다이나믹 듀오의 개코가 복면가왕에 나와 노래를 부르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래퍼가 아니라 보컬로도 충분한 경쟁력을 가졌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를 들은 사람이라면 분명 보컬로의 전향도 권했을 법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개코는 오랜 활동 기간 동안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힙합과 래퍼라는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은 하지 않겠다는 고집스런 가이드라인을 지켜왔던 것이다. ‘하지 않을 것’을 지켜온 노력이 힙합씬의 존경받는 리더의 위치에 개코를 올려놓지 않았을까 싶다.
시속삼십킬로미터라는 회사는 ‘꿀빠는 시간’이라는 천연벌꿀스틱을 만드는 곳이다. 펀딩 붐이 막 일어나는 시점에 와디즈 펀딩에 내놓은 그들의 상품 기획을 보고 감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글자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이야기로 연결된 그들의 상품 제안은, 마치 신내림을 받은 기획 천재들이 쓴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기획력이라면 꿀 스틱뿐만 아니라 각종 식품류로 다양하게 확장해도 금방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4년이 지난 지금도 꿀이라는 테마 하나로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만들어 나가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이 희석되는 게 싫어서였을까. 사실 이들을 보면 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일부러 그렇게 안 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 회사 또한 하지 말아야 할 경계를 더욱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어 가는 중이다. 브랜딩이라는 일을 하다 보면 모든 채널의 디자인과 연결되기 마련이다. 웹이나 인쇄물, 홍보영상이나 사인이나 공간까지도 연계되는 일을 의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 본연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더 전문화하기 위해 ‘브랜딩’이라는 울타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일들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있다.
때로는 이런 일들이 스스로의 한계를 결정짓고, 당장의 이익을 희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멀게 보면 더 나은 방향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게 회사 미래의 안전하고 견고한 울타리를 만들어 줄 거라 희망한다.
사업에 있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 더 나은 브랜드를 만들어가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리스트’를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야 어떤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고 허둥지둥하지 않을 수 있다. 고객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버벅거리지 않고 온전하게 전할 수 있다. 물론 이건 개인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벌써 올해의 3분의 1이 지났다. 나머지 3분의 2 동안 하지 말아야 할 일들, 해서 후회할 일들의 리스트를 다시 한번 들여다봐야겠다.
원문: 유현수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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