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과거의 영광’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나라다. 이 나라는 아직까지도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미국과 더불어 냉전의 한 축을 구가하던 초강대국 소비에트 연방의 기억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초강대국의 면면이라는 것이 사실 알고 보면 이미지만큼 화려하고 영광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러시아는 한때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super power로서의 자기정체성을 놓지 않으려고 애쓴다.
사실 현재 러시아의 위상은 과거 소련 시절과 비교해보면 턱없이 낮다. 문화적, 경제적 수준이나 정치적 영향력 등에서도 소련 시절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차라리 표트르 대제 시절의 러시아와 비교해야 될 지경이랄까. 뭔가 열심히 하려고 몸부림치기는 하지만 서방을 따라잡을 수는 없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이상하게 꼬이는 그런 처지에 놓인 것이 지금의 러시아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런 현실을 절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현재에서 번영을 찾을 수 없는 이들이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이게 비단 러시아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은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한국에서 아직까지도 ‘만주’에 대한 환상이 사그라들지 않는 것, 그리고 이러한 환상을 구체화하기 위해 고구려와 발해의 존재를 현시대로 끌어들이기 위해 애쓰는 것만 봐도 이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이 고구려와 발해의 존재를 열심히 좇기 시작한 건 구한말과 일제식민지 초창기였다. 국제정치적으로 가장 내몰렸던 시기에 과거의 영광을 소환하여 앞으로의 미래에 투사함으로써 현재의 상태를 ‘과도기적 위기’로 인식하기 위함이었다.
러시아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이 놓인 ‘현재’는 그들이 구가하는 ‘영광’과는 적잖은 격차를 보이고 있지만, 그들은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이를 일시적 위기로 인식하고 언젠가는 구소련의 영광을 회복하게 되리라는 열망으로 현실 인식을 대체했다.
이제는 서방국가들이 그렇게 열심히 찾지도 않는 VE day를 유독 러시아만 아직까지도 전승기념일로서 기리면서 대규모 행사를 벌여오는 것도 그래서다. 러시아-소련의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 바로 The Greatest Patriotic War, ‘대조국해방전쟁’이었던 까닭이다.
1945년 이후의 소련은 단 한번도 제대로 된 군사적 승리를 맛본 적이 없었고, 1989년에 끝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소련 스스로를 몰락시키는 계기로 남기조차 했다. 그 이후 들어선 러시아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신들이 벌인 대부분의 군사적 행동들을 성공적인 것으로 포장하고 싶어하게 되었다. 체첸에서부터 조지아, 돈바스, 그리고 우크라이나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쟁 속에서 러시아는 자신들이 입은 구체적인 피해를 직시하는 대신, 자신들의 (상처뿐인) 승리를 1945년 대조국전쟁의 기억과 직결시킴으로써 이것이 위대한 러시아의 영광을 되찾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자위하게 되었다.
아마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쟁 종결도 비슷한 방식으로 흘러갈 것이다. 얼마나 많은 러시아군이 피를 흘렸든, 얼마나 많은 전비가 소모되었든, 혹은 향후 얼마나 극심한 경제제재를 감내하게 되든, 이 모든 곤란은 1945년의 영광과 연결되기 위한 과정이며, 대조국해방전쟁에서의 소련이 그러했듯 자신들이 입는 피해가 크면 클수록 오히려 그 ‘숭고함’은 배가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리라고 본다.
전쟁에서의 피해 누적이 푸틴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그의 ‘제국’을 무너뜨리게 될 거라는 건 지극히 아전인수격의 관측이다. 오히려 이 전쟁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리고 피해가 커지면 커질수록 푸틴의 입지를 강화하게 될 것이다.
원문: 박성호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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