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러시아 친구들과 얘기를 하다가 느낀 점인데, 왜 절반 이상의 러시아인들이 푸틴을 지지하는지 약간은 이해가 되었다.
- 미국에 맞설 강력한 러시아가 필요하다.
- 정적의 싹을 잘라 경쟁자가 없다.
- 언론을 억압하고 통제하여 여론을 조성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러시아 국민들 마음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트라우마’ 가 아닐까 싶다. “과거에는 상황이 지금보다 더 나빴고, 언제든 다시 그렇게 나빠질 수 있다”는 두려움은 푸틴 세대가 공유하는 정서라고 하는데, 바로 이 점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당시 시대적 배경을 알고 있어야 한다.
푸틴은 99년 8월 16일에는 보리스 옐친 대통령으로부터 러시아의 총리로 임명되었으며, 그해 12월 31일 옐친이 사임하면서 총리로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됐다. 그런데 그 이전의 러시아가 어떠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91년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연방의 초대 대통령 옐친은 집권 후 무리하게 경제 개혁을 추진하면서, 러시아의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경제 파탄으로 소련이 해체된 이후 겨우 호흡기를 달고 있던 러시아는 거의 빈사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경제 개혁 실패로 러시아의 GDP는 급락했고, 수많은 국영 기업들의 예산이 크게 삭감되고 몰락하면서, 예금은 휴지 조각이 되고 만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다수의 러시아 국민들은 빈곤과 실업의 늪으로 빠져 버린다.
이렇게 국민들이 굶고 죽어 나가는 판에 관료들은 어떠했는가? 당시 흑자를 내고 있던 에너지 자원 관련 공기업들이 소련 내 관료나 정부 핵심 관료들에게 넘어가면서, 벼락부자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옐친은 집권 연장을 위해 올리가르히(신흥 재벌)들과 결탁하여 그들의 배를 불려주는 정책을 펼쳤다. 이에 더해 96년 체첸 반군과의 전쟁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며, 사실상 독립국가와 진배없는 자치권을 주게 되었고, 98년에는 결국 국가 부도 상태인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게 된다. 90년대 초 이후 약 10년을 회고하는 러시아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 어떤 사람이 상점에 들어와서, 총 들고 돈 내놓으라고 하면 내놓아야 한다. 길 가다가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일이 빈번했으며, 경찰력은 거의 운영되지 못하기에 살아남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었다. 한 마디로 현재의 러시아 국민들이 보기에 지옥과 같았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이러한 10년 간의 러시아 혼란과 불안은 푸틴이라는 새로운 지도자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불법적인 자본 유출과 탈세 등을 일삼던 올리가르히를 손보기 시작했다. 탈세, 사기와 횡령 등으로 올리가르히들을 소탕해 가며, 서서히 그들을 정부에 복종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 최대 국영 석유·가스 기업이 탄생하게 되었고, 이들로부터 정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충당해 나가기 시작했다.
2005년부터 국가최우선과제(National Priority Projects)로 건강, 교육, 주거, 농업 등을 선정하여 육성하고, 여성과 임산부 등에 대한 복지 혜택을 확대해 나갔다. 근로자들의 임금은 대폭 인상되었고, 낡은 산업 시설을 정비해 나갔다. 군수 물자들을 수출하며, 세계 2위 군수 물자 수출국으로 부상하며 외화를 벌어들였다. 결과적으로 절 대빈곤층 비율은 2000년 30%에서 2008년 14% 대로 낮아졌고, 당시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7% 수준을 유지했다.
이 뿐만 아니라, 푸틴은 체첸을 전쟁으로 진압하여 영토를 수복(?)함으로써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2002년 체첸의 모스크바 극장 테러 진압(인질 129명 희생하며 진압)한 사건은 잔인한 진압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체첸 분리독립 진압이 상징했던 것은 당시 권역 내 러시아 영향력 축소라는 흐름을 부숴 버리는 것으로, 러시아 국민들의 푸틴에 대한 폭발적인 열광으로 이어졌다. (지지율 83%로 폭등) 강력한 러시아, 강력한 지도자 이미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결론적으로 푸틴은 러시아 경제와 영광의 회복이라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 시기를 살아왔던 러시아 국민들에게는 큰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독재가 어쩌고저쩌고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푸틴의 정권 교체가 순탄하게 이어지지 않을 경우, 또다시 겪게 될지 모르는 경제 파탄과 혼돈의 지옥이라는 ‘트라우마’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한 기사에 실린 인상적인 문구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1917년 10월 혁명을 앞두고 볼셰비키 중앙위원들 대부분이 당장 무장봉기를 일으키기에는 주위의 적들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중앙위원이던 알렉산드르 쇼트만이 이런 생각을 전하자, 레닌은 코웃음을 치면서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왼쪽 눈을 가늘게 뜨고” 이렇게 반문했다.
“그런데 누가 우리에게 대항하겠나?”
- 『레닌』, 로버트 서비스, 시학사, 545쪽
코로나바이러스가 너무 강하다고 주장하는 참모들에게 푸틴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걔들 중 누가 나에게 덤비겠나?”
원문: 천정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