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푸틴과 젤렌스키에 대해 많은 글을 읽었다.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사회 혼란이 가져오는 ‘반동적(reactionary)’ 경향이 낳은 리더다.
1.
푸틴은 소련 붕괴 후 정치·경제적 혼란의 반동으로 나온 리더다. 그의 집권은 소비에트에 승리를 거둔 서방세계 정치체계에 대한 그의 반감의 결과이기도 하다.
푸틴은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고 찾아온 혼란의 시기에 나타났다. 러시아가 과두 엘리트(oligarchy)들에게 휘둘리며 부패와 경제 혼란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푸틴은 어느 정도의 경제 안정을 가져오며 장기 집권을 하게 됐다. 푸틴 전에는 물건을 어디에서 사야 하는지 몰라서 아는 사람에게 물어물어 샀다면, 푸틴 이후에는 적어도 돈이 있으면 어디서 뭘 살 수 있는지 알게 됐다는 식이다.
2.
젤렌스키는 러시아에서 주로 활동하던 코미디언이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 이후 자신의 정체성(유태계로 러시아어가 모 언어이지만 서방 문화를 좋아하는 신세대 우크라이나인)에 혼란을 겪다가 우크라이나로 돌아왔다.
‘어쩌다 대통령이 된 교사’ 역을 맡은 드라마<인민의 종(The Servant of the People)>에서 각종 정치 풍자로 인기를 얻었다. 드라마상에서는 소셜미디어 대선 캠페인을 벌이는 모습을 선보이기도 했다. 실제 대선 캠페인에서도 드라마 모습 그대로 소셜 미디어를 적극 활용했으며, 대선 토론 등도 제대로 하지 않고 셀피 동영상 등으로 캠페인을 했다.
우크라이나 또한 부패한 올리가르히가 경제를 지배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늘 러시아와의 전쟁 위험에 몰려 있는 불안한 지정학적 환경에 몰려 있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낳은 국민들의 반동적 경향이 코미디언 젤렌스키를 진짜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지금이야 젤렌스키가 엄청난 커뮤니케이션 스킬로 서방세계의 시선을 한곳에 모으고 있지만, 러시아 침공 전까지 젤렌스키가 국정을 잘 이끌었다고 말하긴 어렵다(는 게 상당수 서방 언론의 평가다). 워낙 우크라이나란 지정학 특성상 경제 부패와 러시아와의 관계란 두 가지 과제를 다 잘 수행하긴 어렵긴 하다. 하지만 젤렌스키도 본인 지인을 주요 자리에 꽂아 넣거나, 판도라 페이퍼스에 젤렌스키의 재산 증식 내역이 폭로되는 등 ‘그놈도 똑같다’는 여론이 생긴 바 있다. 러시아와의 관계가 계속 삐걱거리며 지지율이 한때 20%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젤렌스키가 나토 국가들을 하나로 단합시킨 측면도 있고, 푸틴이 자기 야심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는 계기를 만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는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전 세계에는 스태그플레이션 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많은 인명이 희생될 게 뻔한 전쟁이 일어나는 걸 보면서… 만약 젤렌스키가 저 대단한 커뮤니케이션 스킬과 함께 외교적인 스킬을 좀 더 갖고 있었다면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3.
트럼프는 또 어떤가. 말 그대로 반동적 성향에 의해 선출됐다. 오바마(+유색인종 인권 챙겨주기) 싫어. 잘난 여자(힐러리) 싫어. 잘난 척하며 위선적인 엘리트 싫어. 착한 척 싫어. 차라리 내 이익 챙길래. 위선보다 위악이 나아. 가짜정보라고 하는데 난 믿고 싶은 정보인데?
4.
한국의 이번 대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동(action)’보다 반동적 성향에 의해 선출되거나 집권하게 되는 선거였다. 누가 싫어서 상대방을 찍은 것이다.
반동으로 누군가를 뽑는 경우가 불가피할 순 있다. 그러나 그 반동을 어떻게 ‘관리’하는가는 결국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에게, 국민들에게 달려 있다. 반동에 의해 증오와 불신으로 뭉친 이들이 정치 세력화가 되면 미국처럼 트럼프 지지자들이 미 의회를 습격한다든지 하는 일이 일어난다.
‘누가 싫어서 투표하는’ 반동적 성향은 불신의 사회적 비용을 높인다. 그럴수록 리더는 듣고 의견을 수렴해야 하며, 시민은 감시하는 동시에 신뢰해줘야 한다. 당연히 에너지가 더 크게 든다. 하지만 그 에너지는 더 큰 비용(ex. 민주주의 훼손, 전쟁 등등)을 치르기 전에 반드시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다. 지지자들과 반대편 지지자 모두, 에너지를 많이 쓸 각오를 해야 한다.
이제 찍어 누르는 반동의 형태가 아닌, 경청하고 통합하는 동의 방향으로 에너지를 써야 할 것이다.
원문: 홍윤희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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