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에서 오는 좌절’이라는 게 점점 더 청년 세대 사이에 퍼져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10여 년 전 등장했던 ‘수저’ 담론은 금수저와 흙수저의 차이에 대한 자조를 드러냈다. 이후 수저가 단순히 재산이 아니라 총체적인 인격 형성과 문화 향유 능력을 결정한다는 ‘문화자본 수저론’도 꽤나 세간을 떠들석하게 했다. 최근에는 물려받지 않는 한 영원히 집을 살 수 없다는 절망감에 더해, 태생적인 외모에 대한 좌절감까지 퍼지고 있는 듯하다.
그 무엇도 노력으로 바꿀 수 없다, 라는 자조는 정말로 ‘그 무엇도’에 방점이 찍혀 있는 건 아니다. 바꿀 수 있는 게 있다는 것 정도는 바보가 아닌 이상 알고 있다. 가령, 월 200을 버는 사람이 될지 월 300을 버는 사람이 되는 정도는 노력으로 좌우할 수도 있다. 전세 5천에 살지, 2억에 살지도 노력으로 가능한 차이일지도 모른다. 적당한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도 노력으로 도달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노력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상당수 청년들의 생각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그들이 말하는 건 ‘그 이상’이다. 진짜 원하는 삶, 진짜 안정, 진짜 사랑 같은 것이다. 지금은 비록 아무것도 없지만 직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기 소유의 집 한 채 갖고, 존중받거나 평생 큰 걱정 없을 정도의 직장에 다니며,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고 싶은 게 ‘태생의 한계 이상’ 어디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 도달하기 위해서는 답이 ‘태생을 바꾸는 것밖에 없다’는 좌절감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이상과 현실의 간극 앞에서의 감정이나, 그 간극을 다루는 방식이 모두 옳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나치가 유대인을 혐오하고 학살하기 이전에, 그들이 1차대전 배상금으로 극한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게 그들을 옹호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청년 세대가 이 간극 앞에서 보이곤 하는 혐오, 조롱, 낙인, 증오 같은 것들도 옹호할 여지가 별로 없다. 그럼에도 좌절감을 어느 정도 이해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어쨌든 2차대전 발발의 원인으로 꼽히는 독일 경제를 파멸시킬 정도의 배상금에 관해 성찰하듯, 앞으로의 현실을 위해 이 청년 세대의 절망을 고민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여러모로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면모도 있겠지만, 오히려 가중되고 있는 측면에 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경제적 취약 계층과 안정적 계층 사이의 간극은 더 벌어졌다. 부동산 폭등으로 유주택자와 무주택자 사이의 간극도 아득해졌다. 소득은 더 이상 태생을 이길 수 없고, 입시와 학습에서의 격차도 심화되었다. 청년들은 과거보다 확실히 덜 사랑하고 있으며, 덜 결혼하고 있다. 이런 현실은 사실 사회적으로 봤을 때, 한순간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꿈 많고 낭만을 누리는 청년들보다는, 좌절과 자조로 가득하여 상처를 주고받기 바쁜 청년들로 가득하다는 것이 결코 좋은 징조는 아닐 것이다. 전자와 후자 중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운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후자라면, 우리 사회가 어딘가가 심각하게 고장나 있다는 징후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원문: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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