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kip to content
  • Skip to secondary menu
  • Skip to primary sidebar
  • Skip to footer

ㅍㅍㅅㅅ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 Home
  • 스타트업
    • 마케팅
    • 투자
  • 시사
    • 경제
    • 국제
    • 군사
    • 사회
    • 언론
    • 역사
    • 정치
    • 종교
  • 문화
    • 게임
    • 교육
    • 덕후
    • 만화
    • 스포츠
    • 애니
    • 연예
    • 영화
    • 인문
    • 음악
    • 책
    • 학문
  • 테크
    • IT
    • SNS
    • 개발
    • 공학
    • 과학
    • 디자인
    • 의학
    • 환경
  • 생활
    • 건강
    • 부모
    • 성인
    • 여행
    • 영어
    • 음식
    • 패션
  • 특집
    • 개드립
    • 인터뷰
  • 전체글

2030 사이에서 ‘태생에서 오는 좌절’이 퍼져나가는 이유

2022년 7월 26일 by 정지우

출처: Freepik

‘태생에서 오는 좌절’이라는 게 점점 더 청년 세대 사이에 퍼져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10여 년 전 등장했던 ‘수저’ 담론은 금수저와 흙수저의 차이에 대한 자조를 드러냈다. 이후 수저가 단순히 재산이 아니라 총체적인 인격 형성과 문화 향유 능력을 결정한다는 ‘문화자본 수저론’도 꽤나 세간을 떠들석하게 했다. 최근에는 물려받지 않는 한 영원히 집을 살 수 없다는 절망감에 더해, 태생적인 외모에 대한 좌절감까지 퍼지고 있는 듯하다.

그 무엇도 노력으로 바꿀 수 없다, 라는 자조는 정말로 ‘그 무엇도’에 방점이 찍혀 있는 건 아니다. 바꿀 수 있는 게 있다는 것 정도는 바보가 아닌 이상 알고 있다. 가령, 월 200을 버는 사람이 될지 월 300을 버는 사람이 되는 정도는 노력으로 좌우할 수도 있다. 전세 5천에 살지, 2억에 살지도 노력으로 가능한 차이일지도 모른다. 적당한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도 노력으로 도달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노력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상당수 청년들의 생각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그들이 말하는 건 ‘그 이상’이다. 진짜 원하는 삶, 진짜 안정, 진짜 사랑 같은 것이다. 지금은 비록 아무것도 없지만 직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기 소유의 집 한 채 갖고, 존중받거나 평생 큰 걱정 없을 정도의 직장에 다니며,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고 싶은 게 ‘태생의 한계 이상’ 어디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 도달하기 위해서는 답이 ‘태생을 바꾸는 것밖에 없다’는 좌절감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이상과 현실의 간극 앞에서의 감정이나, 그 간극을 다루는 방식이 모두 옳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나치가 유대인을 혐오하고 학살하기 이전에, 그들이 1차대전 배상금으로 극한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게 그들을 옹호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청년 세대가 이 간극 앞에서 보이곤 하는 혐오, 조롱, 낙인, 증오 같은 것들도 옹호할 여지가 별로 없다. 그럼에도 좌절감을 어느 정도 이해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어쨌든 2차대전 발발의 원인으로 꼽히는 독일 경제를 파멸시킬 정도의 배상금에 관해 성찰하듯, 앞으로의 현실을 위해 이 청년 세대의 절망을 고민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여러모로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면모도 있겠지만, 오히려 가중되고 있는 측면에 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경제적 취약 계층과 안정적 계층 사이의 간극은 더 벌어졌다. 부동산 폭등으로 유주택자와 무주택자 사이의 간극도 아득해졌다. 소득은 더 이상 태생을 이길 수 없고, 입시와 학습에서의 격차도 심화되었다. 청년들은 과거보다 확실히 덜 사랑하고 있으며, 덜 결혼하고 있다. 이런 현실은 사실 사회적으로 봤을 때, 한순간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꿈 많고 낭만을 누리는 청년들보다는, 좌절과 자조로 가득하여 상처를 주고받기 바쁜 청년들로 가득하다는 것이 결코 좋은 징조는 아닐 것이다. 전자와 후자 중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운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후자라면, 우리 사회가 어딘가가 심각하게 고장나 있다는 징후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원문: 정지우의 페이스북


이 필자의 다른 글 보기

  • 상대적 박탈감으로 늪지대가 되어버린 한국 사회에 대해서
  • 모험할 여력을 주지 않는 사회가 ‘모방하는 소비문화’를 만든다
  • 공정이란 무엇인가? 헤아릴 수 없는 깊이의 불공정에 관하여

Filed Under: 사회

필자 정지우 twitter facebook

문화평론가 겸 변호사. 『분노사회』,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이제는 알아야 할 저작권법』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JTBC, MBC 등의 문화평론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고,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EBS 비지니스 리뷰〉에 출연하기도 했다.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를 운영하고 있으며, 저작권·개인정보·형사 사건 등의 분야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Primary Sidebar

SPONSORED

RECOMMENDED

Footer

ㅍㅍㅅㅅ

등록번호: 서울, 아03293
등록일자: 2014년 8월 18일
제호: ㅍㅍㅅㅅ
발행인: 이승환
편집인: 이승환
주소: 서울특별시 서초구 강남대로 369 12층
발행일자: 2014년 8월 18일
전화번호: 010-2494-1884
청소년보호책임자: 이승환
Privacy Policy

Copyright © 2025 · Magazine Pro on Genesis Framework · WordPress · Log 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