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근래의 사회는 상대적 박탈감이 전방위적으로 양산되는 사회라는 생각이 든다. 가령 상위 10% 정도의 생활 수준을 가진 사람은 대략 500만 명 정도가 존재한다. 그중 일부인 100만 명만 SNS를 한다고 하더라도 “나 빼고는 다 잘사는 것”처럼 보일 만큼 엄청난 숫자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에 민감한 아이들은 그렇게 잘사는 수백만 명의 삶에서 눈을 뗄 수 없다. 누구나 플렉스 한 번으로 매주 호캉스나 명품 가방, 호텔 라운지에서의 와인 한 잔, 브런치 세트로 매일 시작하는 아침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십 대, 삼십 대가 지나가면서 어릴 적부터 봐왔던 ‘보편적인’ 삶 혹은 나의 미래처럼 보이던 것들이, 소수에게만 허락된 특권이라는 걸 알게 된다. 물론 가끔은 ‘플렉스’한 상류층 삶을 잠깐이나마 맛볼 수도 있다. 몇 달 치 생활비를 아껴 특급호텔의 야외풀에서 사진을 찍어볼 수도 있고, 매일 편의점 도시락을 먹다가도 주말 한 번쯤은 비싼 브런치를 먹으러 가볼 수도 있다. 또 12개월 할부로 명품 가방을 구매하거나, 모험처럼 수십 개월 할부로 비싼 외제 차를 사볼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든 언제쯤에는 환각에서 깨어난다. 내가 봐왔던 것들은 나의 삶으로 예정된 것이었다기보다는 타인들의 삶이었고, 모두 잘사는 것처럼 보이던 그 몇백만 명의 삶이라는 것도 극소수의 삶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2.
상대적 박탈감의 사회가 심화될수록 소수의 수백만 명은 자기 삶을 적극적으로, 전방위적으로 표출하고 드러낸다. 반대로 수천만 명의 초라한 삶은 더 감추고 숨겨야 할 것이 된다. 그동안에는 과거에는 부자들이 주변에 있더라도 깊이 마주칠 일이 없었다. 만나는 사람들은 그저 대개 자신과 비슷한 생활 수준을 공유하는 동네 이웃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동네 이웃’들은 생략되고 건너뛰기를 당한다. 공유해야 할 생활들의 자질구레함은 부끄럽고 초라한 것이어서, 인터넷 카페나 네이트판, 당근마켓 같은 익명의 이웃과만 나누게 된다. 반면 최적의 조건에서 육아하는 TV 속 연예인들, 값비싼 주상복합에서 사는 셀럽들, 최고의 전망과 환경에서 살아가는 어느 상류층 누군가의 일상만을 강제로 공유 당한다.
이런 격차 사회에서 그나마 정부나 정치인은 공정함과 정의로움을 추구하며 내 편을 들어줄 것만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고 느끼게 된다. 실제로 정치인들이 얼마나 어떤 노력을 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내게 선사하는 또 다른 상대적 박탈감이다. 정의를 외치면서 황금의 땅에 들어앉아 임기 중 수억에서 수십억의 시세차익을 챙겼다는 정치인들, 공무원들의 존재 자체는 상대적 박탈감에 불을 지핀다.
알고 봤더니 모두의 삶이라 생각했던 것은 소수의 삶이었고, 모두의 권리는 소수의 특권이었으며, 모두를 위한 룰인 줄 알았던 것은 소수만을 위한 룰이었던 것이다.
3.
그런 가운데,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매우 뚜렷한 ‘밈’이 하나 생겨난다. 일종의 한 세대가 공유하는 아주 당연한 통념이나 공감대 같은 것이다. 아이 낳아 키우는 것은 저 ‘소수의 기득권’을 위한 노예나 만드는 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부동산 폭등에 매일 신이 나서 입가가 찢어지는 사람들, 겉으로는 정의를 외치지만 이미 그들만을 위한 정보와 룰 속에서 챙길 건 다 챙겨둔 사람들, 모두가 어려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많은 자산 증식을 이루어낸 사람들. 내 자식을 만들어서 그들 밑에 일하게 하다니? 결국 또 노예 같은 삶,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좌절하며 괴로운 삶을 반복하게 되는 걸까?
이 이야기는 내가 지어낸 것이 아니다. 청년 세대 사이에서 “대학 가면 술 마시고 밤새 놀아야지.” 같은 생각보다 더 당연하고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이야기에 가깝다. 실제로 사람은 자신이 보는 것들 안에서 관념을 형성하고 그 관념에 구속당하며 살아간다. 현실이라는 것은 내가 상상해낸 인생의 복합적인 관계망 같은 것이다. 이 시대의 현실이란 전방위적으로 노출된 상류층의 삶이고, 그 삶이 만들어내는 격차감이다. 그것보다 더 현실적인 현실, 더 강력한 현실이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단 하나의’ 현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대안적인 공동체들, 예를 들어 나와 일상을 공유하는 이웃, 더 소중한 것에 집중하는 가족, 평생을 곁에서 함께하며 현실의 다른 측면을 보던 친구, 삶의 본질적인 측면을 건네주던 종교나 문학 같은 존재들도 점점 더 그 힘을 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이 시대는 상대적 격차감과 질척거리며 어울려 살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거대한 늪지대와 더 다르지 않게 되어가는 것이다. 나아가 이 늪은 점점 더 구체적인 하루하루가 되어, 생존과 목숨 자체의 문제가 되어갈 것이다.
원문: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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