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디즈니 영화 중 『미녀와 야수』를 가장 좋아한다. 그 이유는 거의 하나로 수렴하는데, 주인공이 ‘책을 읽는 여성’이고, 그녀가 책을 따라나서는 듯한 여정이 이 이야기의 중심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는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어딘지 ‘이상하다’고 말한다. 책을 읽는 그녀는 마을의 관습적인 삶 바깥에 존재하는 듯 그려진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책을 읽었기 때문에, 마을 바깥을 꿈꾸고, 가부장의 정점과 같은 개스톤을 거부하고, 거대한 서재가 있는 야수의 집에 감격한다.
사냥꾼 개스톤은 힘센 미남에 가부장적인 폭력성으로 무장한, 마을 내에서 가장 우뚝 선 남성미 넘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는 벨의 책을 빼앗아 웅덩이에 던져 버리고, 여자가 책을 읽으면 생각이 많아져서 좋지 않다는 식으로 말하며, 벨을 소유하고자 온갖 폭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벨이 그에게 저항할 수 있는 건 책의 힘 덕분이었다.
벨은 마을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었고, 옳지 않은 것을 싫어할 수 있었으며, 낯선 것에 대해서도 이해할 줄 알았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가장 빛나는 능력은 스스로 맞지 않다 느끼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옳다고 느끼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아무에게나 관대하지도 않았고, 무엇이든 용인하지도 않았으며, 자기만의 중심으로 스스로의 길을 밝혀나갈 줄 알았다.
역사적으로, 권력자들은 책 읽는 이들을 가장 두려워했다. 책 읽는 권리를 얻기까지, 일반 시민들이나 노예들, 여성들은 거의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 싸워와야 했다. 책을 읽으면 스스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고, 자기만의 세계를 갖게 되며, 자기 안의 세계와 다른 현실과 싸울 수 있게 된다.
현실이 권력과 힘으로 꽉 짜인 채 존재하는 실질적인 폭력이라면, 한 사람의 마음 안에 싹튼 이념의 세계는 그러한 현실과 싸우는 거의 유일한 힘이 되곤 한다. 그래서 이길 수 없는 현실에 구속되어 있는 이들은 다락방에서, 부엌에서, 헛간에서 몰래 책을 읽었다. 책이 만들어주는 세계가 이 현실과 대적할 수 있는 또 다른 현실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잘못된 세상과 맞서 싸우면서 옳은 기준을 정립해나가고, 멋진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건 아닐 것이다. 어떤 이들은 오히려 열심히 책을 읽어서 자기가 가진 권력을, 자기가 한 자리 차지한 현실을, 자기가 누리는 힘을 합리화하고 강화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인류 역사 속 대부분의 책 읽기란 그런 권력자들의 것이었다. 그들은 책 읽기가 힘이라는 걸 알았다. 책 읽기가 무기이고, 생명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기에 오히려 바로 그런 생명을 건, 무기가 되는, 어느 약자들의 책 읽기야말로 그 하나하나가 매번 역사적인 순간이고, 삶에서의 생명과 다르지 않은 셈이다.
책 읽기는 무기다. 폭력을 당하고, 핍박받고, 관습에 강요당하고, 인생을 강제당하며, 희망과 꿈을 빼앗긴 이들에게 마지막 남은 무기가 책 읽기다. 그들은 그 폭력 속에서 책을 읽으며 다른 꿈을 꾼다. 그는 삶의 모든 걸 빼앗길지라도,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다. 그렇게 그는 평생 잃지 않는 자기만의 작은 우주 하나를 가진다.
책을 제대로 읽는 사람은 자기를 억압하는 힘에 타협하지 않고, 자기의 옳음을 고집스럽게 지키고자 하며, 잘못됨을 끝내 거부하고 질책한다. 그는 그런 자신의 우주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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