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인플루언서의 육아 영상을 봤다. 아이는 이제 겨우 30–40개월 되었을 뿐인데, 벌써 알파벳을 다 알고 영어로 단어를 썼다. 아이에게 일종의 가정교사가 있는 모양이었는데, 그로 인해 다른 또래의 아이들보다 무엇이든 빨리 익히는 것처럼 보였다.
한 시사 프로에 따르면, 상류층 부모들 중심으로 아이를 ‘영어 유치원’에 보내기 위한 ‘과외’가 유행한다고 한다. 영어유치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apple’ 따위를 받아적는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떤 집의 아이들은 전방위적으로 관리 받으면서, 일찍부터 남들보다 ‘앞서’간다.
한편, 지난 1년 반 동안 코로나로 인한 마스크 착용 의무화와 거리 두기 등으로 ’언어발달‘에 문제가 있는 아동들이 대폭 늘었다고 한다. 언어 발달 문제로 아동발달센터를 찾는 부모들이 코로나 이전에 비해 3배는 늘었다고 한다. 어린이집 교사와 학부모 등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70%가량이 아동 발달에 코로나19가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 그중 핵심에 언어발달 문제가 있다.
어린이집 내에서도 모두 마스크를 쓰다 보니, 마스크로 입이 가려져 아이가 입 모양을 볼 수 없어서 언어를 익히기 어렵다. 발음도 뭉개지고 소리도 명확하게 듣기도 어려워서 집단생활 속에서는 언어를 익히기가 더 쉽지 않다.
나아가 학생들의 경우 코로나19 기간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과목에 따라서는 2배 이상 늘어났다. 보통학력 이상 비율도 줄어들었다. 이에 대해 꼭 코로나 탓만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지만, 교육격차가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1타 학원강사들은 한 해에도 수백억을 벌고, 대치동 학원가 등은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그 시간에 기초학력이나 보통학력 수준도 달성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급증한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유아들부터,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고민을 해야 하는 청소년들까지 적어도 ’학력‘에 관한 한 극복하기 힘든 격차가 생기는 셈이다.
공정의 문제란 그런 것이다. 이미 종일 가정교사가 붙어서 3살부터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는 아이와, 코로나19와 마스크 때문에 입을 떼지도 못한 아이와의 격차가 이미 불공정하다. 능력주의란 그런 것이다. 1년마다 쌓이는 1만 시간, 혹은 50만 분, 그 매시간 매분에 서린 불공정이 있고 그로 인해 능력의 차이가 생긴다.
관리받지 못한 수만 시간은 이후에 어떤 노력으로도 따라잡지 못할 수도 있다. 대개 나의 능력이라 믿는 건 나만의 능력이 아니며, 나의 공정이라 믿는 건 모두의 공정이 아니다. 그 속에는 철저히 은폐되어 있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빙산과 같은 층이 숨어 있다. 누군가는 이미 레이스에 오를 때, 아파트만 한 빙산을 갖고 있고, 누구는 북극곰만 한 빙산이나 갖고 있을 뿐이다.
공정성이 논란이 될 때마다 아쉬운 점은 이러한 격차에 대한 심층적인 이야기들이 슬그머니 가려지는 것 같다는 점이다. 물론, 낙하산 인사, 부모가 놓아주는 사다리, 채용 비리, 입학 비리, 수치화된 능력이 불합리하게 줄 세워지는 문제 같은 것도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 일들조차 사실은 ‘표면’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불공정은 훨씬 뿌리 깊은 것이고, 뼛속 깊은 곳에 자리한 문제이다. 대개 나에 대한 불공정을 외칠 때, 우리는 자신이 다른 누구에 대해 얼마나 불공정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 잊는다. 그런데 한 사회의 공정성에 대한 진정한 이야기가 가능하려면, 먼저 자신이 발 디딘 땅의 불공정함부터 들여다보고, 그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공정성은 중요한 가치이고, 불공정한 사회는 분명 끊임없이 심판대에 올라와야 한다. 그런데 그때마다 나의 억울함 못지않게 그런 억울함조차 모를, 혹은 억울함을 이야기조차 할 수 없는 어떤 이들에 대해 먼저 고민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싶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그리고 불공정에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이가 있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
함께 보면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