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번 시간에는 「팬데믹은 앞으로 다가올 기후위기의 “개막식”일 뿐이다」이라는 글에서 SF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실제 기온이 오르면 벌어질 기후 시나리오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왜 이렇게 절망적인 시나리오가 임박했는데도 기후 행동이 어려울까요? 똑똑한 사람들이 내놓은 시나리오는 책으로도 제법 많이 소개되어 있고, 이미 인지하고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책을 추천받아 읽기도 하고, 채식주의나 제로 웨이스트 등의 친환경 트렌드에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기도 하고, 관련 상품을 직접 구매해서 사용하는 개인적 실천까지 다다른 사람도 많습니다.
특히 2021년은 놀라울 정도로 제로 웨이스트나 ESG 경영이라는 친환경 키워드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일부 기업과 정부는 ‘녹색 에너지’라는 형태의 해결책을 개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해결책을 설치하고 확대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단결이나 경제적 힘의 집결, 의식의 유연성을 갖추지 못한 상태입니다. 얼마 전 마무리된 COP26(유엔기후협약 당사자 회의)는 초창기 의제였던 ‘석탄 연료 사용 폐지’에 극적으로 가까워지는 듯했으나, 결국 ‘단계적 감축’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사실상 이전 목표였던 기온 상승 2도 억제라는 목표는 포기한 듯합니다.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시스템을 세운다는 것은, 전 세계를 쌓아 올린 탄소 기반의 교통과 에너지, 공업과 농업 시스템을 처음부터 뜯어고친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개인적인 실천이 아닌, 기후를 구제하겠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정치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즉 기후를 위해 표를 던져야 하고, 표심을 잡기 위해 친환경적인 정책을 내세우는 정치인까지 나타나야 한다는 거죠.
하지만 이렇게 정치적인 기후 움직임은 포착하기도, 실천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우선 기후 행동은 다 같이 수행해야 하는 팀 과제의 성격입니다. 그런데 효능감은 잘 체감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의 역사와 문명의 끊임없는 진보를 믿고 있고, 그 진보의 혜택이 자신에게도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사실상 인류의 역사 전체로 보면 5%에 불과한 발전의 역사는 일탈에 가깝고, 그 짧은 기간 동안 지구를 황폐화시켰는데도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기후위기를 위한 단합이 어려운 것은 ‘기후위기의 책임 소재가 누구에게 있느냐?’라는 질문에 명확하게 답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노를 저어야 하죠?
분명 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해서 피해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고, 피해를 입는 사람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흔히 자연법상의 질서에서 가해자가 피해자가 보상하는 형태를 일반론적인 정의로 합의합니다. 그렇다면 기후위기의 책임은 누가 가장 강하게 져야 할까요? 지구 온난화의 진위를 둘러싼 많은 공방이 있었지만, ‘인류세’라는 지질구분학적 용어가 학계와 일반인들 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유행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일단 인간이 나쁜 것은 확실합니다.
원래 지질학에서는 지질학적 변화가 가시적으로 보일 때 붙은 지층의 세대를 구분하는 개념으로 ‘세’라는 용어를 씁니다. 인간이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세월이 지나야 구분되는 층이 발생하죠. 하지만 인간이 눈부신 현대문명을 쌓아 올린 지 몇십 년이 채 되지 않은 이 시점에 그런 변화가 나타났다는 놀라운 사실 덕분에, 현대를 인류세로 드라마틱하게 정의하자는 주장이 등장했습니다.
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오즈본 월슨(Edward Osborne Wilson)은 수많은 생물 종이 사라지고 곰팡이와 세균 정도만 남은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며, 일명 ‘고독세’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였습니다. 다른 누군가는 불로 음식을 조리하면서 시작된 인간의 문명이 내연기관까지 발명하며 기후오염을 일으켜 망하게 생겼다고 ‘화염세’라는 얄궂은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모두 공통적으로 인간이 자연에 끼친 해로움을 강조하는 개념입니다.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될 것입니다.
그 책임을 개인적 차원에서라도 감당하고자 ‘제로 웨이스트’ 라이프 스타일이나 탄소 감축에 동참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자세입니다. 하지만 극적인 변화를 위해선 단연코 국가 레짐 단위의 변화, 즉 투표를 통한 정책 변화가 필수적입니다. 보셨다시피 국가 내부에서 여러 정책 안건을 뚫고 기후위기가 메인 안건으로 올라오기는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세계 질서를 위해서라도 가장 많은 피해를 낸 자, 즉 역사 속에서 이산화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한 국가를 특정해서 그 책임을 물게 하는 것이 최선의 답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곧 이러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선 책임 기준을 정하는 것부터 문제입니다. 당장 오늘의 탄소 배출량을 따질 것인지, 과거까지 소급해서 합친 양을 따질 것인지부터 의견이 분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따져 봅시다. 누구에게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합리적일까요?
역사 속 이전 세대들에게 책임을 돌리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물론 탄소기반 문명은 18세기 영국에서 석탄을 태우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화석연료 기반의 이산화탄소의 절반 이상은 1989년 이후에 배출되었습니다. 1751년 이후로는 1,578기가톤이 배출된 반면, 1989년 이후로는 그 절반을 넘는 820기가톤의 이산화탄소가 방출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역사의 탓으로 돌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집단적인 행동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Carbon Dioxide information Analysis Center, Oak Ridge National Laboratory, “global. Regional, and National Fossil-Fuel CO2 Emissions”(Oak Ridge,2017)
어느 나라가 제일 잘못했는지 따져보는 게 좋을까요?
그렇다면 역시 탄소 배출량이 높은 국가 순으로 줄을 세워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릅니다. 2018년을 기준으로 배출량을 따지면 중국이 27%, 미국이 15%, EU가 9%, 인도가 7%로, 20세기 후반 경제 강국으로 성장한 국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COP26에서 밝힌 1.5도 이내의 기온 억제라는 감축 목표를 위해서 해당 국가들의 협력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후담론에서 국가 단위의 해결책은 제대로 작동한 사례가 드뭅니다. 산업혁명 이후 태어난 탄소 기반 문명에서는 화석연료를 더 많이 사용할수록 국력이 강해지는 게 상식이었습니다. 국가경쟁력을 위해 기후는 언제나 차후의 문제로 미뤄졌습니다. 그 결과로 세계 2위의 탄소 배출국인 미국은 이름에 걸맞는 책임은커녕 2017년 6월, 트럼프 대통령의 지휘 아래 기후 협약에서 탈퇴했습니다. 심지어 비용이 많이 드는 친환경 에너지 대신 효율이 좋은 화석 연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망언까지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기후위기 타파는 언제나 국력의 우위를 지키려는 목표의 하위 목표로 설정됩니다. 그래서 기후 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보다는 국가 간 경쟁 조건과 득실을 계산해 경쟁에서 승리하는 시나리오만을 찾게 됩니다.
따라서 국가레짐을 기준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국가레짐을 기준으로 탄소배출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았다.
- 탄소 기반 문명에서 탄소배출=국력인 상황에서 기후 문제는 언제나 국가경쟁력에 밀려 후순위 의제였다.
- 국가 간 경쟁 조건과 게임 이론을 가정할 시 승리하는 시나리오만 찾느라 국제협력은 뒷전이 된다.
국가 단위의 책임 문책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북반구와 남반구,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탄소 배출에 대한 딜레마 때문입니다.
개도국은 빈곤과 기후위기 사이의 딜레마에 봉착해 있습니다. 선진국의 탄소 기반 경제 모델을 그대로 따라 해서 빈곤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탄소 문명을 가속화할수록 마주할 기후위기에는 취약합니다. 기후위기의 이자가 스스로에게 거대한 피해를 입히는 형태로 돌아오게 되는 겁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공평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들의 무제한적인 탄소 배출을 허락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요. 선진국은 무제한적인 탄소 기반의 문명을 마음껏 누려 발전을 이룩했으니 공평하지 않다고 불만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탄소 배출을 무제한 허용하는 것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적절한 해결책이 될 수 없기 때문이죠.
인당 탄소 배출량은 적지만 인구와 경제 규모로 인해 국가 전체의 탄소 배출량이 높은 중국과 브라질 등이 이러한 케이스에 해당합니다. 이 국가들에게 협조를 요구하는 것은 필수적이지만, 이들은 역사적인 이유나 현실적인 이유를 핑계로 기후 대응에 필요한 기준을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너무 어렵다면, 새로운 기준을 세워 봅시다
때문에 국가 간 이득 관계를 넘어선 다른 책임 기준으로 제시되는 것 중 하나는 기업 단위의 책임제입니다. 1751년부터 2010년 사이 약 260년 동안 배출된 온실가스의 63%는 90개의 탄소 메이저 기업으로부터 발생했고, 이에 대한 책임과 역할을 해당 기업들이 감수해야 된다는 주장입니다.
90개의 메이저 기업은 주로 화석연료와 시멘트, 철강 등의 분야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 업계에 대해 강력한 규제를 고려하는 것 또한 타당한 책임분배의 원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국가와 달리 소비자들과 투자자들이 타깃을 특정해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도록 압박을 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비자들이 더욱 기후위기에 동참하게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노를 젓기 위한 여러 방안 중 저를 가장 매혹시켰던 것은 기후위기를 인권의 시각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 프레임의 전환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인권을 기준에서 바라보는 기후위기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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