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눈꽃 맥주, 논산 딸기 맥주가 생긴다면 어떨까? 각 지역을 대표하는 맥주가 생긴다면? 맥주만 마셔도 국내를 여행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소주는 서울소주나, 부산소주나 큰 차이를 느끼기 힘들다. 하지만 맥주는 다르다. 자유도가 높아 맛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맥주로 재미난 실험을 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일본이다. 일본의 크래프트 맥주 산업은 2021년 기준 500여 곳의 양조장으로 대표된다. 전체 맥주 산업의 2%를 차지할 만큼 작지만 단단한 팬층으로 꾸준히 성장하는 중이다. 오늘의 마시즘은 일본만의 독특한 맥주 문화, 지비루에 관한 이야기다.
일본의 지역맥주, 지비루가 뭔데?
기린, 아사히, 삿포로, 산토리. 일본 맥주 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빅 4(BIG 4) 브랜드다. 하지만 일본에 가면 100종이 훌쩍 넘는 특별한 현지식 맥주를 만날 수 있다. 바로 ‘지비루(地ビール)’다.
‘지비루’는 쉽게 말해 일본의 크래프트 맥주다. 지역성을 짙게 띄고 있다. 이것이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차이점이다. 각 지역의 퀄리티 높은 특산품처럼 고유한 자원을 이용해서 맥주를 적극적으로 양조한다.
그러나 규모가 작다고 결코 맛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 도야마의 ‘우나즈키 지비루’는 국제 맥주 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할 만큼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코로나 이전에는 오직 지비루 투어를 위한 전용 여행 상품이 팔릴 정도였으니까.
일본 전역을 통틀어 수백 종류의 지비루가 있다. (과장을 더하면) 죽을 때까지 매일 지비루만 마셔도 다 못 마실 정도랄까?
고구마부터 가다랑어포까지, 무한한 지비루의 세계
덕분에 지비루를 마시는 것만으로 그 자체로 즐거운 여행이 된다. 지역의 특별한 물과, 최상급의 농수산물을 이용해서 독특한 개성과 감성이 가득하다.
예를 들어 일본의 아바시리 양조장에서 내놓은 ‘오흐츠크 블루’. 이 맥주는 오호츠크해의 빙하에서 얻어낸 물과, 해초에서 추출한 파란색을 이용해서 파란색의 맥주를 만들었다. 반면 COEDO는 현지에서 가장 유명한 농산물인 붉은색 고구마로 ‘COEDO 베니이카’ 맥주를 빚었다.
이외에도 쌀로 유명한 니가타현에서는 코시히카리 쌀을 이용한 맥주 ‘에치고 맥주’를 개발했고, 나가노 현의 얏호 브루잉은 가다랑어포를 넣은 ‘쏘리 우마미(SORRY UMAMI) IPA’를 한정판으로 만들기도 했다. 시즈오카 지역에 가면 녹차와 와사비로 만든 ‘와비사비’ 페일 에일을 맛볼 수 있다.
이처럼 대체 불가능한 지역의 재료를 이용해서, 특색 있는 맥주를 만들어내는 것이 지비루의 아이덴티티이자 장점이다. 일본 최대 겨울 휴양지 시가고원에 가면, 스키를 타고 탭룸에 가서 시가고원 생맥주를 마실 수 있다. 여행이 곧 지비루이자, 지비루가 곧 여행이 되는 이유다.
기부를 하면, 맥주를 준다고? 후루사토 노제
하지만 단기적인 관광 수익에 그치지 않고, 일본 내에서 지비루가 지속적으로 소비될 수 있던 배경은 따로 있다. 바로 ‘후루사토 노제(ふるさと納税)’다. 일종의 세금 납부 제도로, 이용자들은 원하는 지자체에 기부를 하고 답례품을 받는다. 어차피 내야 할 세금을 기부하고, 덤으로 선물까지 받는 1+1 개념이랄까?
후루사토 노제의 핵심이 바로 ‘답례품’이다. 마치 쇼핑을 하듯 웹사이트에서 직접 상품을 고를 수 있는데, 특히 ‘지비루’는 해마다 인기 랭킹에 오른다. 예를 들어 서울에 사는 사람이 부산에 일정 금액을 기부하고, 부산 크래프트 맥주를 리워드로 받는 셈이다. 온라인으로 간편하게 맛있는 맥주를 주문하고, 원하는 지역에 기부로 응원한다는 기분 좋은 느낌은 덤이다.
맥주에 상상력을 더하면 즐거움이 된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맥주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국가다. 식사 전에 에피타이저처럼 맥주를 마시고, 퇴근 전 혼자 선술집에 들러 맥주를 마시고 갈 정도로 일본인의 맥주 사랑은 대단하다. 워낙 맥주를 소비하는 애호가의 폭이 넓고, 외식문화의 성장에 따라 마시는 취향이 세분화되다 보니 다양한 개성이 발휘된 지비루가 더욱 발달할 수 있었다.
주세법 개정과 함께, 한국에서도 다양한 크래프트 브루어리의 맥주가 늘어났다. 2년 전부터 ‘곰표 맥주’를 선두로 각종 브랜드 콜라보와 함께 흥미로운 수제 맥주들이 등장하고 있다. 라거 중심의 한국 맥주에서 벗어나, 다양한 종류로 선택지가 늘어나는 것은 한 사람의 맥덕으로서 무척 반가운 일이다. 일본 지비루의 사례를 참고한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지역과 연계한 다양한 맥주 실험이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제도적으로도 뒷받침이 되기 위해서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앞으로는 더욱더 재미난 방향의 크래프트 맥주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원문: 마시즘
참고문헌
- “3년새 2배 급성장”… 수제맥주에 취한 한국, 조성훈・지영호・이민하・강기준・고석용, 머니투데이, 2018.4.12
- 수제맥주 1,000억 시대…19년 만에 ‘콸콸’, 박형윤, 서울경제, 2021.2.7
- 일본, 김빠진 맥주시장 다시 살린다…내달 110년 만에 ‘주세 대개혁’, 유진우, 조선비즈, 2020.9.24
- 일본의 스키천국 나가노현 시가고원에 다녀왔습니다, Japankuru, 2020.4.17
지금 일본은 지역 맥주 열풍, 매일경제, 201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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