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맥주 광고에는 정해진 룰이 있다.
맥주 광고는 수십 년간 이 룰을 벗어난 적이 없다. 식당의 포스터도 그렇다. 어린 여성 연예인이 소주 모델이라면, 나이가 좀 있는 남성 연예인은 맥주 광고의 상징이다.
최근 제주맥주 광고는, 기존 맥주 광고의 문법을 부쉈다. 캬~ 소리는 등장하지 않는다. 연예인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이 광고하는 것은 제주맥주라는 상품 그 자체다.
왜 한국맥주는 맛이 없었을까?
제주맥주가 있기 전,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이 쓴 <화끈한 음식, 지루한 맥주>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한국 맥주가 더럽게 맛이 없다고 비판한 부분에 한국인은 열광(…)했다. 이미 일반 대중 사이에서 ‘한국 맥주는 맛이 없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그 당시의 한국 맥주는 점잖게 ‘물맛’ 혹은 ‘보리차맛’이 난다는 평을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밋밋한 맛을 상쇄하고자 단맛이 나는 소주를 섞어 ‘쏘맥’으로 즐겼다.
한국 맥주가 밋밋한 이유는, 한국에서 맥주를 분류하는 기준에 기인한다. 독일에서는 맥아 함유량이 100% 이상일 때에만 맥주로 분류하고, 일본은 66.7%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당시 한국은 10%만 충족시키면 맥주로 분류될 수 있었다. 당연히 해외 맥주보다 맥아 함량은 낮았고, 맛의 차이도 있었다.
대기업들의 보수성도 한몫했다. 대기업은 다수가 선택할 제품을 판매할 수밖에 없다. 한국 안주는 주로 맵고 짜기에, 맛보다는 청량감을 강조하는 ‘페일 라거’를 생산했다. 카스, 하이트, OB 모두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것밖에’ 마실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양하고 특이한 맥주를 마시고 싶은 사람들은 방법이 없었다. 4캔 1만 원 편의점의 수입 맥주를 집에서 마시며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제주맥주가 ‘에일’로 도전장을 던진 이유
제주맥주는 2017년 8월에 런칭했다. 이미 대기업이 장악한 라거에 비해, 에일은 한국에서 별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이런 시장에서 제주맥주는 밀로 만든 맥주, 위트 에일로 시작한다. 맥아를 많이 넣은 ‘맛이 진한 라거’를 만들면 대중에게 더 쉽게 어필했을 텐데, 시장에서 검증받지도 못한, 대기업도 쉽게 도전하지 못한 에일을 선택했다.
이는 제주맥주의 철학 때문이다. 잘 팔리는 맥주를 만드는 걸 넘어, 한국 맥주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오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천편일률적인 맥주의 맛에 질린 사람들에게 ‘맥주의 다양성’을 알려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기존 맥주가 맛이 없다는 선정적 마케팅이 아닌, 새로운 맥주를 통해 다양성을 넓히려는 전략이었다.
‘다양성’은 제주맥주의 행보를 한 단어로 집약하는 키워드다. 이를 위해 제주맥주는 마케팅과 홍보, 브랜딩 모두 어떤 맥주 브랜드도 하지 않았던 시도들을 보여준다.
남들이 안 하는 것만 골라 걸어온 길 1. 왜 제주여야만 했는가
Q. 왜 제주인가? 제조업인데도 불구하고 유통이 어렵지 않나? 혹시 창업주가 제주 사람인가?
실제로 제주맥주가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다. 제주맥주의 문혁기 CEO는 대구 사람이고, 대학교는 뉴욕에서 나왔다.
Q. 그런데 왜 제주여야 했는가?
제주도는 절대로 유통에 유리한 입지가 아니다. 똑같은 물건도 제주도로 보내려면 택배비 3000원이 더 붙듯이, 제주에서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다. 제주도에서 생산한 맥주를 육지로 보내는 비용은 적지 않다. 돌이 많고 평지가 드물어 생산비용도 많이 든다.
그럼에도 제주도에서 시작한 이유는, 제주도라는 아름다운 곳을 맥주로 녹여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특별한 추억을 만들기 위해 제주도에 방문한다. 이때 제주맥주를 만난다면, 사람들은 제주와 맥주에 대한 추억을 오감으로 기억할 수 있다.
크래프트 맥주는 곧 문화다. 각 브루어리는 각자의 철학을 중심으로, 특색 있는 문화들을 선보인다. 제주맥주 또한 문화를 소비자들에게 의미 있는 경험으로 전달하고자 했고, 그래서 제주라는 특별한 장소에서 시작한 것이다.
제주도라는 지명이 가진 매력도 있다. 에메랄드빛 바다, 화산섬, 바람이 가져다주는 청량한 이미지를 맥주에 더하면 훌륭한 브랜딩이 가능하리라는 계산이다. 실제로 이들의 첫 상품인 ‘제주 위트 에일’은 감귤피와 건조 오렌지 껍질 등을 이용해서 상큼한 맛을 살렸다. 맛에서도 제주를 떠올리게 되며, 브랜딩의 일관성이 높아진다.
이미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초반 1년간은 제주도에서만 판매하기도 했다. 제주도로 휴가를 간 직장인이 제주에서만 마실 수 있다는 맥주를 보면 호기심에라도 집어들 확률이 높다. 이후 제주맥주를 마실 때마다 휴가의 추억을 떠올리는 트리거로 작용했다.
물론 제주에서만 판매하는 것도 반대에 부딪혔다. 그렇지만 서울에 진출해 당장의 매출을 높이는 것보다, 제주에서만 즐길 수 있는 장기적 브랜딩이 더욱 중요하다는 게 제주맥주의 판단이었다.
남들이 안 하는 것만 골라 걸어온 길 2. 왜 IPA가 아닌 위트 에일이어야 했는가?
2017년 크래프트 맥주 시장은 약 200억원 규모였으며, 제주맥주는 전체 시장의 1% 미만이었다. 인기를 얻던 브랜드는 더부스와 맥파이였고, 중심 상품은 IPA(인디아 페일 에일)이었다. IPA는 당시 미국 시장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던 대안 맥주였다. 하지만 제주맥주는 IPA가 아니라 위트 에일로 시작했다.
당시 인기였던 IPA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IPA의 맛 때문이었다. IPA는 19세기 영국에서 인도로 보내기 위해, 맥주의 알코올 도수과 홉 함량을 크게 높인 데에서 시작했다. 그래서 상당히 씁쓸하고 강렬하며 도수도 높다. 밍밍한 라거에 길들여진 한국인들에게는 적응하기 어려운 맛이었다. 그래서 IPA는 확장에 한계가 있었고, 당시 인기가 있던 양조장은 축소되거나 폐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면 제주맥주가 고른 위트에일, 즉 밀맥주는 한국인이 가볍게 접근하기 좋은 맛이었다. 라거보다는 신선하고, IPA보다는 산뜻하게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한국 음식과도 잘 어울렸다. 실제로 제주위트에일은 제주도 대표 음식인 고등어회와 방어회, 흑돼지 오겹살 등 기름진 음식과 잘 어울리게 만들어졌다. 신선하지만, 부담스럽지는 않을 것. 제주맥주는 이 어려운 회색 지대를 찾아낸 것이다.
남들이 안 하는 것만 골라 걸어온 길 3. 어떻게 유통사를 다양하게 늘렸나?
일반적으로 국내 크래프트 맥주사들의 전략은, 생맥주 위주로 펍에서 공급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펍을 비롯한 유흥채널은 대개 여러 명과 함께 방문하게 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익숙한 한국의 술 문화인 쏘맥으로 돌아가게 된다. 크래프트 맥주를 대중화한다는 제주맥주의 첫 번째 미션을 달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제주맥주는 크래프트 맥주가 편의점과 대형 마트에서 소비되는 양이 많음에 주목했다. 초기부터 이들 채널에서 제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많은 투자를 했다. 생맥주뿐만 아니라 캔맥주, 병맥주까지 다양한 상품에 투자했다. 멋진 패키징 디자인과 독특한 맛은, 뚫기 힘들다는 5대 편의점과 대형마트, 할인점까지 입점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제주맥주가 걸어온 길을 보면 하나의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대중들이 익숙하지 않은 길에 도전하되, 지나치게 마니악하지 않게 접근한다. 대중성에만 지나치게 천착한 대기업은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마니아적 시선만 바라본 크래프트 양조장은 외면받았다. 마니아의 지식을 갖추고 대중의 눈높이에서 생각해야 한다.
제주맥주 상장의 의미
제주맥주는 테슬라 특례 요건을 통해 코스닥 시장에 입성했다. 하이트진로 이후 두 번째 주류회사 상장이었고, 국내 크래프트 맥주 기업 중에서 증시에 입성한 첫 사례였다. 인기도 많았다. 일반 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공모 청약에서 1,748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제주맥주가 테슬라 트랙을 타는 데에는, 지금껏 추구해 왔던 다양성에 대해 높은 평가가 수반되었다. 제주맥주의 존재로 인해 국내에서 크래프트 맥주 대중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는 점을 인정받았고, 그래서 제조업 범주의 기업 중, 가장 풍부한 성장 여력을 인정받았다.
상장 이후 또 다른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제주 흑보리와 초콜릿 밀맥아가 들어간 ‘제주 거멍 에일’을 출시한 것이다. ‘거멍’은 검다는 의미의 제주 방언이다. 한국은 흑맥주의 불모지로, 기네스나 스타우트 이외에는 대중적으로 인식되는 흑맥주가 없었다. 제주맥주가 또다른 도전을 시작한 것.
애니메이션 CF, 제주맥주의 새로운 도전이 되다
다시 CF로 돌아가 보자. 사실 기존 맥주 CF에 대한 고정관념은 고객보다도 맥주 산업 종사자들이 더 강하다. 역사가 오랜 제조업이다 보니 굳어진 성공 공식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은 제주맥주에도 압박이었다. TV CF는 전 국민에게 다가가는 만큼, 빅모델을 써야 한다는 압박이 가해졌다.
하지만 제주맥주는 ‘맥주의 다양성’을 추구했고, CF 역시 다른 맥주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싶다는 바람이 강했다. 여기에 광고 대행사 TBWA가 제안한 애니메이션이 돌파구가 됐다. TBWA는 제주맥주 초기에 새롭게 디자인한 엠블럼을 보여줬을 때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준, 몇 안 되는 회사 중 하나이기도 했다.
TBWA에서는 다양한 CF 크리에이티브를 담은 스케치 보드를 보여줬는데, 정작 제주맥주가 주목한 것은 CF의 분위기를 잡고자 다양한 이미지를 모아놓은 무드 보드였다. 제주의 자연을 일러스트로 그린 그림들이 꽂혀 있었는데, 그 일러스트를 활용하자는 데 의견이 모인 것이다.
일러스트는 그림체에 따라 강렬한 개성을 표현할 수 있다. 일러스트라는 양식 자체만으로도, 맥주 CF뿐 아니라 CF 업계에서도 흔하지 않은 표현 방식이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만 골라서 걸어온 제주맥주의 이미지를 표현하기에 적역이었다. 그렇게 제주맥주의 첫 CF는 일러스트를 활용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제주맥주 내 구성원들의 반응도 좋다. “맥주 광고 같지 않은 광고라 좋다, 제주맥주스러운 광고다” “유튜브나 인스타에서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비스포크, 아이폰 광고가 떠오른다”는 반응까지 다양하다. 제주맥주 구성원들이 대개 2~30대라서 젊은 감각을 지녀서 그런 것도 있지만, 광고를 통해 여러 관계자를 만나야 하는 영업직 직원들 사이에서도 반응이 좋은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업계에서의 반응도 좋다. “제주맥주가 ‘제주맥주’ 하는 광고”라는 게 중평이다. 그간 제주맥주가 쌓아 온 이미지가 ‘기존의 틀을 깨는 새로운 도전’에 가깝게 형성되어 있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제주맥주 CF는 이제 전파를 타며 소비자들의 반응을 얻어내고 있다. 이 새로운 CF의 결과가 어떻든 간에, 새로운 도전이 여기에서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제주맥주는 또 한번, 다른 경쟁사가 생각하고 실행하지 못하는 것을 시도할 것이다. 다음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다.
※ 제주맥주에서 금전적 지원을 받아 작성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