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의 구성원들이 실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안전함’을 느껴야 한다. 그제야 자신의 강점을 드러내고 자신감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사람들은 행복하게 일할 수 있다. 그래야 재미도 의미도 성장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불안감을 느낄 때 우리는 파충류의 뇌를 활용해서 나를 공격하려 하는 모든 것에 대항할 뿐이다. 극한의 에너지를 써서 눈치를 보고 위험 요소를 차단하는 데 집중한다. 강력한 자신감을 토대로 합리적 최선책을 찾아다니는 나날들과는 완전히 반대의 우중충하고 근시안적인 나날들을 보내게 된다.
이와 반대로 안전감을 느끼는 조직의 평균 생산성은 불안감을 느끼는 조직의 세 배 이상일 것이다. 당연한 얘기 같은데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일부 보스들이 팀원들을 채찍질해 불안감과 긴장감을 조성시키는 것이 생산성의 핵심이 아닐까 하는 환상을 지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물이나 사람이나 긴장감 속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기간이 있기는 하다. 막말로 대다수의 남성에겐 평생 가장 많은 칼로리를 소모하는 곳은 무시무시한 조교들이 고함을 질러대는 훈련소일 것이다.
외부적 압박이 있으면 일시적으로나마 공포에 의해 더 부지런히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크로스핏 같은 운동 프로그램은 이런 환경을 긍정적으로 구축하려고 하는 시도이기도 하지 않은가. 여하튼 이런 사례들이 있다 보니 무작정 스파르타적인 환경이 안전감이 넘치는 환경보다 ‘이롭다’고 여기는 깊은 믿음이 있다.
문제는 결과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결과와 환상을 구분 못해서, 혹은 메타인지가 부족해서 발생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일시적이고 노동집약적인 특정 업무들을 제외하고는 자신감 넘치고 안전감이 넘치는 환경이 대체로 스파르타 환경을 능가한다. 물론 경쟁과 보상에 대한 건강한 에너지가 넘쳐흘러야 한다는 전제 조건은 있지만 말이다.
윽박을 질러서 사람들의 기를 죽이고 그들을 우울하게 만들면 그것을 견뎌내는 고통 때문에 대부분 번 아웃 되기 마련이라 생산성이 낮다.
그렇지 않다면 세계 최고의 스포츠 선수들의 코치는 모두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지 않았을까? 연예인 기획사도 모두 스파르타 매니저를 고용했을 것이고,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교수님도 모두 스파르타 코치를 한명씩 고용했으리라 생각한다. CEO 전용 스파르타식 컨설턴트들이 대유행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안전감을 주지 않는 방법은 여럿 있다. 시시각각 눈만 마주치면 비난을 하고 모욕을 한다든지. 한번 실수할 때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며 지금까지의 인상을 싸잡아서 일반화해 욕한다든지. ‘니 까짓게, 니가 그렇지 뭐’ 같은 누구나 듣기 싫은 경멸스러운 표현으로 잘근잘근 씹는다든지. 혹은 ‘이건 당신이 책임질 일이야 각오해’ 같은 위협감을 형성한다든지.
이러한 방법들은 무언가 카리스마적이거나 스파르타적으로 비치곤 하지만 실제론 조직의 생산성을 극도로 하락시키고 구성원들이 자기방어로 똘똘 뭉치게 만드는 언어들이다. 이런 매니저를 찾아내는 AI를 만들어 회사에 보고할 수 있게 만든다면 다들 거금을 주고 도입하리라 생각한다.
가족에게도, 부하에게도, 친한 아우들에게도 자칫 모멸적 표현을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쏟아내기가 참 쉽다. 결과는 항상, 그야말로 항상 안 좋다. 그냥 나쁜 습관일 뿐이다. 안전감을 주면서도 자긍심과 동기부여가 높아지는 커뮤니케이션. 이런 커뮤니케이션이 정말 어려운 법이다.
추천하는 방법은 하나. 나에게 가장 소중한 ‘고객’이었다면 내가 어떻게 말했을까, 방금과 같은 태도를 보였을까 라는 기준으로 판단하면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자신의 가족, 부하, 친한 아우들이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고객일 수도 있지 않은가. 상사나 진짜 고객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존재가 아닌가.
주위 사람에게 잘하자. 팀원들은 존경하는 리더를 만나 성심성의껏 따르고 싶은 인간으로서의 본능이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본능을 짓밟아도 된다고 믿는 사람들을 권위주의자 혹은 꼰대라고 부르지 않는가.
원문: 천영록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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