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잘러. 일 잘하는 직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반대말은 일못러. 태어날 때부터 일잘러인 사람도 없고, 한번 일못러가 영원한 일못러도 아니다. 나 역시 신입사원 시절 일못러였다. 글쓰기를 좋아해 홍보팀에 들어왔지만 소위 말하는 말랑말랑한 글만 쓰다가 회사에서 정한 형식과 틀에 맞춰 글을 써야 했으니 적응하지 못해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반대로 MBA를 다녀와서 컨설팅을 했을 때는 마치 날개를 단 것처럼 활약하면서 당시 일잘러를 뜻하는 에이스로 불리기도 했다.
일잘러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없다. 나름의 정의를 하자면 주도적이고, 신념이 강하고, 센스가 뛰어난 직장인이 일잘러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회사는 일잘러를 필요로 한다. 일잘러가 아닌 사람은 회사와 면접 자리에서 눈치만 봐야 하는 걸까?
회사에는 임원들과 직원들 모두에게 사랑받는 일잘러가 있다. 직원들은 ‘그 직원과 일하면 정말 든든해요. 책임감, 완벽주의, 포기하지 않는 정신, 거기에 성격까지 좋거든요’라고 말한다. 임원들은 ‘그런 친구가 나중에 대표가 되지 않을까?’라고 평한다. 이런 직원이 조직에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단기적으로는 회사에게 좋은 성과를, 장기적으로는 다른 직원들에게 동기 부여를 가져다주기에 상당한 플러스 요소가 된다.
내 주위에도 늘 일잘러가 있었다. 그들과 대화하면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아니, 저 나이에 벌써 저런 생각을 하다니!’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일잘러에게는 돈 주고 배울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업무 센스나 일머리로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이는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일 욕심이 있고 거기에 타고난 두뇌 회전에 활달한 성격까지 더해졌을 때 나오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여기서 이런 상상을 해보게 된다.
회사가 일잘러들로 가득하면 완벽할까?
국내기업 인하우스 컨설팅팀에서 일했을 때였다. 팀은 MBA, 사업부 기획담당, 프로세스 혁신팀 출신들로 구성됐다. 당연히 사내에서는 에이스들만 모아놨다는 말들이 나왔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시도는 초반에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결국에는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되돌아보니 처음에 삐끗할 수밖에 없었던 세 가지 원인이 있었다. 이를 통해 발견한, 회사가 필요로 하는 직원의 모습을 살펴보자.
하나, 일잘러들은 자신에 대한 신념이 넘쳤다.
각 팀에서 선발된 인원들로 구성된 팀이다 보니 모두 자신의 능력이나 경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당시 인하우스 컨설턴트 두 명과 외부 전략컨설팅펌 컨설턴트 한 명, 총 세 명이 한 조를 이뤄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시작하자마자 문제가 발생했다. 밸런스가 무너진 것이다.
프로젝트는 끌어주는 역할과 밀어주는 역할 모두 중요하다. 그런데 인하우스 컨설턴트 두 명 모두 끌어주는 역할에만 강점이 있었다. 큰 그림을 볼 줄 알고 브레인 역할도 잘했지만 정작 서로에게 손발이 되어주는 것에는 약했다. 그래서 의견 조율이 되는가 싶다가도 자리로 돌아가서는 자기 방식대로 업무를 하는 일이 계속됐다. 결국 외부 컨설턴트가 중간에서 업무를 배분하고 조율하는 역할을 해줘야 했다.
이 경우처럼 회사는 밀어주는 역할을 하는 직원도 필요하다. 이들은 일잘러에 비해서 기획력과 판단력은 부족하지만 전체 프로젝트 그림이 그려지면 납기 안에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 줄 아는 엄청난 장점이 있다. 한마디로 일이 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만약 회사에서 일잘러와 함께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는 포지션을 뽑는다면 당연히 밀어주는 역할에 강점이 있는 사람을 채용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결국 일잘러만 잘나가는 거 아닌가?’ 하고 질문할 수 있다. 절대 아니다. 주위를 보면 알 수 있다. 회사에서 잘나가는 것의 잣대 중 하나는 임원 승진이다. 많은 직원의 뒷말 대상인 임원들이 모두 일잘러인가? 아니다. 각자 자신만의 강점을 지속적으로 어필해서 그 자리에 오른 경우가 많다. 밖으로 비치는 모습은 일잘러가 고속 승진하고 높은 연봉을 받을 거 같지만 5년 뒤, 10년 뒤 결과를 보면 큰 차이가 없다. 가끔 예전 회사들의 임원 인사 뉴스를 검색해보는데 놀랍게도 밀어주는 역할을 하는 분들이 결국에는 임원이 되는 모습을 종종 보곤 한다.
또 한 가지, 밀어주는 역할을 하는 직원은 일잘러들에게 엄청나게 인기가 많다. 그 직원과 일하고 싶다고 줄을 설 정도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프로젝트 결과물의 품질이 보장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잘러들의 템포를 조절할 줄 아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일잘러는 일잘러를 컨트롤할 수 없지만 밀어주는 역할을 하는 직원들은 가능하다.
둘, 일잘러들은 배려가 2% 부족했다.
일잘러가 대놓고 함부로 대한다는 의미가 절대 아니다. 상대적으로 배려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배려의 정의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컨설팅팀에 일잘러들을 모아 놓으니 항상 ‘네 말은 잘 알겠어. 그런데 내 말 좀 들어볼래’라는 모드였다.
당시 회사가 위계질서가 확실한 국내기업이었는데도 일잘러들 사이에는 그런 위계질서도 없었다. 나이 많은 부장님들이 실력파 과장들을 어려워할 정도였다. 결국 팀 구성 한 달 만에 나이가 가장 많은 부장님이 도저히 프로젝트 할 자신이 없다면서 원래 팀으로 복귀하는 일이 발생했다. 회사는 면담을 통해 원인을 파악했고 시니어와 주니어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직원으로 충원했다.
이런 면에서 회사는 팀원을 배려할 줄 아는 직원도 필요하다. 배려할 줄 아는 직원은 팀이 하나가 되게 하는 힘이 있다. 일잘러가 ‘네 말은 잘 알겠어. 그런데 내 말 좀 들어볼래’라고 말할 때 배려할 줄 아는 직원은 ‘네가 말하려는 포인트가 이거 이거구나. 사실은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왔는데 같이 맞춰볼까?’라고 말한다.
한편으론 일잘러들끼리 배려가 부족한 게 열등감의 결과물일 때도 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 대학생 중에 서울대생이 가장 열등감이 크다는 얘기와 일맥상통한다. 일잘러가 옆자리의 일잘러와 항상 비교하는데 서로를 배려해줄 여유 따위는 없다.
셋, 일잘러들은 팀보다는 개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컨설팅팀에 일잘러들만 모아놨으니 회사의 기대치가 꽤 높았다. 임원들이, 팀장이, 그리고 외부 컨설턴트들이 개개인을 평가했다. 재밌게도 일잘러들은 평가에 스트레스를 받기보다 평가를 잘 받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한다. 그래서 단기간에 개개인의 실력이 엄청나게 향상한다. 나 역시 직장 생활 15년 중에 단연코 이 기간에 가장 실력이 늘었다.
그런데 중장기적으로 보면 계속되는 경쟁으로 피로감이 쌓이면서 팀원들 간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생긴다. 팀의 성과가 아니라 내 이름이 임원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에 더 신경이 갔다. 나도 사업기획에 잔뼈가 굵은 부장님들까지도 경쟁자로 여겼을 정도. 프로젝트가 끝나면 멤버 대부분이 전략기획 부서에 배치가 될 텐데 그때 과연 이 선배들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을지를 가늠하곤 했다. 과연 이런 생각을 나만 했을까?
때문에 회사는 개인보다 팀을 먼저 생각하는 직원도 필요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직원이 어디 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거쳤던 모든 회사에 늘 그런 직원이 있었다. 팀을 소중히 여기고 팀이 깨지지 않길 바라며 팀으로서 성과를 내길 바라는 그런 직원 말이다. 많은 회사가 일 잘하는 문화만큼이나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 이런 직원 중심으로 팀워크를 갖춘 문화다. 그렇기에 개인주의가 강한 회사에서 팀을 먼저 생각하는 직원을 면접 자리에서 만나면 한 번 더 눈길이 갈 것이다.
회사는 일잘러 뿐 아니라 밀어주는 역할을 하는 직원도, 배려할 줄 아는 직원도, 팀을 먼저 생각하는 직원도 필요하다. 이런 직원들이 어우러졌을 때 각자가 빛나는 어벤져스와 같은 팀일 것이다.
원문: Mark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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