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호주 방문을 했다. 호주 정상회담을 했고, 공동성명서를 채택했다. 그런데, 그간 진행된 경과를 복기해보면 매우 놀랍다. 결론부터 말해 문재인 대통령이 고난도 외교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진심 감탄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호주 국빈방문을 할 즈음, 국제적으로는 2가지 이슈가 있었다.
-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주최한 ‘민주주의 정상회의’가 있었다.
- 중국의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대한 ‘보이콧 결정 여부’가 이슈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이 주최한 민주주의 정상회의에 참여했다. 발언 내용을 보면 민주주의에 대해 발언하되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 내용들이었다. 인권, 가짜뉴스와 민주주의 관계에 대해 발언했다.
호주 국빈 방문 중 호주 기자들이 베이징 동계 올림픽에 대한 입장을 물어봐도, 혹은 중국 포위 전략의 일환인 쿼드와 오커스에 대해 물어봐도, 중국을 자극하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재인 대통령은 ‘베이징 동계 올림픽에 대한 보이콧’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은 중국 언론으로부터 환영을 받기도 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주최한 민주주의 정상회의 참석은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반면, 베이징 동계올림픽 보이콧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는 발언은 중국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과 중국 양쪽에게 선물을 하나씩 줬다. 재밌는 것은 그다음부터다.
중국의 위협에 맞서 한국-호주의 군사 협력 강화
문재인 대통령은 호주 국빈방문을 통해, 호주에 K9 자주포를 무려 1조 원어치 수출했다. 그리고 희토류 등의 광물을 수입하기로 했다. 호주는 중국과 외교적 대립 상태에 있다. 호주 입장에서는 군사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때 문재인 대통령은 호주에게 K9 자주포를 선물했다. 한편으로는 호주에 수출한 것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중국의 위협에 맞서 한국-호주의 군사 협력을 강화한 것이기도 하다.
‘호주의 희토류 수입’도 같은 맥락이다. 희귀한 광물을 통칭해서 희토류라고 한다. 반도체를 비롯한 많은 전자 제품에서 ‘희토류’는 꼭 필요하다. 세계적으로 희토류가 가장 많은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은 다른 나라와 갈등이 있는 경우 희토류를 ‘안보 무기’로 사용하기도 한다.
실제로 2010년 일본-중국이 센카쿠열도(중국명 다오위다오) 분쟁이 있을 때, 중국은 일본에게 희토류 수출을 금지했다. 일본은 중국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한국이 호주에게 K9 자주포 1조 원 규모를 수출한 것도 중국 위협에 대한 한국-호주의 군사적 방어력을 키운 것이다. 한국이 호주에게 희토류 수입을 하기로 한 것 역시도 중국 위협에 대한 방어력을 키우는 조치였다.
한국-호주 공동성명 10항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한국-호주의 공동성명 내용이다. 일단 제목부터 흥미롭다. 「한국·호주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공동성명」이다.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선언한 것이다. 물론 외교적 수사에 그칠 가능성도 있으나, 실제 내용을 보면 내실이 단단하다.
성명은 총 27개 조항으로 이뤄져 있다. 이중 가장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10항이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10. 주요 해상 무역 국가로서, 호주와 대한민국은 인도-태평양의 안정이 남중국해를 포함한 해양 영역에서의 국제법 준수에 달려있다는 점을 인식한다. 정상들은 분쟁이 유엔해양법협약을 포함한 국제법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양 정상은 항행 및 상공 비행 자유 유지의 중요성을 재확인하였다. […]
위 조항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
- ‘남중국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 ‘해양 영역에서 국제법 준수’를 분명히 하며,
- ‘유엔해양법과 국제법에 따라 항행의 자유’를 명시하기 때문이다.
위 세 가지 조문은 모두 남중국해를 자국의 영해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주장과 배치되는 것이다. 1600년대 이후 해양 패권을 주도한 영국-미국이 주장하는 항행의 자유와 그를 뒷받침하는 국제법을 분명히 한다.
한국-호주 공동성명 21항
언론에서는 덜 다뤘는데, 한국-호주의 공동성명 21항에도 중요하고 흥미로운 내용을 담았다.
21. 정상들은 자유롭고 개방된 국제 무역을 촉진하는 데 있어 다자 규범과 제도의 중요성을 인정하였다. 양 정상은 경제적 피해를 초래하는 방식으로 경제정책 및 조치를 오용함으로써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이며 지속 가능하고 투명한 시장 경제 원칙들과 규칙 기반 국제 무역시스템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양 정상은 또한 WTO, APEC, G20 및 OECD를 포함한 다자 기구 및 포럼에서 더욱 긴밀히 조율해 나가기로 하였다. […]
21항의 주요 내용은 ‘국제무역과 관련된 개방된 다자규범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조항이 외교적인 맥락에서 의미를 갖는 이유는 미국과 유럽연합은 ‘개방된 국제무역 질서’가 중국의 부상에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개방된 국제무역 질서와 다자기구’를 형해화(形骸化)하려는 의도가 있다. 실제로 미국이 채택한 중국보고서와 유럽연합의 중국 관련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대한민국 최고의 중국경제 전문가 중 한 명인 한국 금융연구원의 지만수 박사는 이런 미국-유럽의 게임룰 변경 시도를 배구와 이종격투기로 비유한다. 배구 게임은 WTO 체제 내에서 ‘경제 영역에 국한된’ 경쟁을 의미한다. 1995년 출범한 WTO 체제의 최대 수혜자는 중국이 됐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손해 보는 장사를 했다고 생각한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게임의 룰’을 변경하려고 시도한다. 비경제 영역도 싸움의 방식으로 인정하는 새로운 룰을 만들려 하는 중이다. 이를테면 ‘이종격투기 게임’으로 룰을 변경하려는 중이다. 국제적 다자무역 질서를 위축시키고, 비경제적(군사적·외교적) 수단을 강화하려 한다.
한국 경제 역시 ‘개방된, 다자간, 국제무역질서’에서 가장 큰 혜택을 받았던 나라 중 하나다. 미국, 유럽연합, 중국의 이해관계가 무엇이든과 무관하게 한국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자유롭고, 개방된, 국제무역 질서, 다자규범과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국-호주의 공동성명에 담긴 21항의 의미다.
즉 21항은 미국-유럽연합과 다른 경제구조를 가진(중국과 유사한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의 국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국-호주의 공동성명 26항과 27항을 보면, 2+2 형식으로 2년마다 정기적으로 회담을 하기로 했다. 국방부 장관, 외교부 장관, 통상 관련 장관 등이 연례 전략회의, 국방 정책 회의, 경제공동 회의, 에너지-광물 자원 협의 회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포괄적-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걸맞은 후속 실무 조치들이다.
‘미중 패권 경쟁 시대’에 한국의 외교는 어떠해야 하는가
한국은 미국 편이어야 하는가, 중국 편이어야 하는가? 많은 전문가는,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은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한국의 외교는 한국 편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실천으로 입증한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호주 국빈방문을 즈음한 시점,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정리해보자.
-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주최한 민주주의 정상회의에 참석해서, 미국의 체면을 세워줬다. 그러나, 중국을 자극하는 발언은 하지 않았다.
- 문재인 대통령은 “베이징 동계올림픽 보이콧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발언함으로써 중국 언론으로부터 환영 입장까지 받아냈다. 중국에게 선물을 줬다.
- 한국-호주 정상회담을 통해, 호주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K9 자주포를 1조 원 규모만큼 수출하고, 중국이 안보위협 카드로 사용할 수 있는 희토류를 호주에게 수입하기로 했다. 수출-수입 모두에서 국익을 극대화한 경우이다.
- 중국은 싫어하지만, 한국의 국익 관점에서 명백하게 바람직한 ‘남중국해를 둘러싼 항행의 자유’에 대해 호주와의 공동입장을 분명히 했다.
- (미국과 유럽연합은 축소하려는 입장이지만) 한국의 국익 관점에서 명백하게 바람직한, ‘자유롭고 개방된, 다자간, 국제무역질서와 제도의 중요성’을 공동성명에 반영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호주 국빈방문 기간에 보여줬던 일련의 외교적 행보들은 미국 편도, 중국 편도 아니었다. 어떤 것은 미국 맘에 들고, 어떤 것은 중국 맘에 드는 것이었다. 더욱 본질적으로는 (국제정세 및 제약조건을 고려하되) 한국의 국익을 극대화하는 외교였음을 알 수 있다.
원문: 최병천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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