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6일, 12·12 군사 쿠데타와 5·18 광주 무력진압의 주역이었던 노태우 씨가 사망했다. 그는 전직 대통령으로서 북방외교 개척과 한국의 세계 경제 편입에 탁월한 역량을 보였으나, 권력 찬탈과 수성에 있어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인민의 자유와 목숨을 빼앗는 체제를 공고히 한 문제적 인물이다.
그가 보인 능력들은 당대 한국인들이 주요하게 삼던 가치인 ‘부의 축적을 통한 생존’에는 부합했다. 그러나 그의 쿠데타에서도 드러나듯이 ‘인간의 생존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느냐’라는 국가의 본질에 관한 중대한 물음에 있어선 약육강식이 원리로 작동하는 폭력적 위계질서를 그대로 수용하고 강화하는 방법을 답으로 택했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국가의 정체성과 국민 안위의 내적 성장에 큰 장애와 위험을 안겼다.
쿠데타를 혁명으로 자처하는 모든 세력들이 그러하듯 12·12 세력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공동체를 위한 개혁의 일환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두환도 그랬지만 노태우도 박정희 독재 시기 동안 굳어진 기존 반민주 체제의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한 기초 작업인 민주적 정치 의사 결정 구조를 배제하거나 억압하는 통치행위를 했다. 이로써 자신의 집권 정당성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모순을 보였다. 즉, 행위와 주장의 불일치를 통해 집권의 이유가 기존 세계의 개혁이 아님을 노출했다. 단지 시대 환경의 변화에 대한 소수 세력 차원의 조응일 뿐이었음을 드러냈다.
노태우 씨는 이러한 자기고백적 모순의 공백을 ‘보통 사람’이라는 기만적 상징으로 치장함으로써 집권의 당위를 얻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빛을 발한 능력들은 그의 정치 철학이 드리운 그림자 안에 갇힐 수밖에 없다. 요컨대 군사 쿠데타란 것은 폭력적 위계가 한 사회의 굳건한 체제 질서화를 향할 때만 정당성이 인정되므로, 그의 통치행위가 진정 개혁이 되려면 집권의 뿌리인 자신의 쿠데타부터 배격해야 하는데 이를 실행할 순 없었던 것이다. 한계가 명확할 뿐 아니라 이를 끝끝내 인정치 않음에도 민주정을 내세웠단 점에서 내용과 질 측면에서도 기만적인 셈이다.
따라서 예를 들어 그가 재능을 보인 기간 건설 산업의 발흥 역시 그러한 자신의 집권 수성 의지와 물질적 생존 추구 일변도의 한국 사회가 동기화되어 일어날 수밖에 없었으며, 그렇게 확장되고 고착된 질서에 사회적으로 수반되는 부패와 반칙, 위법과 암투를 개선 없이 그대로 체제 내에 편입시켰다. 이는 비민주적 통치 대부분이 그러하듯 비록 미래의 지대는 열지라도 미래의 의미는 봉쇄하는 전형적인 후진적 현상이었다.
이러면 사회 전체적으로 부는 늘어날지 모르지만 국가가 국민에게 분배하여야 하는 체제 이익은 불평등한 폭력의 정점에 다가선 소수에게만 편중될 수밖에 없다. 노태우 씨 역시 자신이 그렇게 구조화(혹은 정당화)한 세계관의 일부였으므로 4,000억 원대의 비자금을 죄의식 없이 조성할 수 있었다. 그의 친인척들이 비리에 연루된 것도 같은 이유다.
이후 쿠데타와 군사진압과 비자금 조성 등에 관해 우리 법정은 그의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을 죄로 규정했다. 이는 사회적 합의인 우리의 법체계, 즉 20세기 후반의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판단에 따라 그의 행위가 구성원 전체의 이익에 반한다고 결정한 것이다. 법이란 진리가 아니며 재판정에서의 판결은 진실을 무조건 담보하지 않는다.
다만 구성원들이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가능한 한 진리에 가깝다고 모두가 합의할 만큼 섬세하게 법을 다듬고, 도저히 진실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최대한 지력을 담아 판결이 내려진다. 즉 법이란 근원적으로 사회가 합의한 언어와 관념 그리고 논리체계를 총동원해 당대의 공통 규정을 사안에 적용하고 이를 인정키로 합의한 것이다. 구성원들의 관념 바깥에 있는 것은 법이 될 수 없고, 판결은 언제나 시대 속 개인들의 총합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러므로 과거를 반추해 미래를 그리겠다면 그의 공을 볼 것이냐 과를 볼 것이냐 하는 식의 2차 평면 같은 이야기보단, 당시의 한국인 내면에 흐르던 욕망과 그의 개인적 욕망이 공명한 결과가 어떤 관념의 무늬를 그리는 데까지 시대적인 합의가 있었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다. 대통령을 민주 선거로 뽑는 제도를 가진 나라에 있어 이것이 집권자에 대한 평가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 지점 때문에 노태우 씨가 자신의 반민주적 행위와 국가에 끼친 위해, 그리고 결정적으로 국가 구성원인 국민의 생명을 경시한 점에 대해 스스로 반성과 사과를 통해 용서를 구했느냐가 가장 중요해진다. 물론 그는 반성과 사과를 한 적이 없는 채로 사망했다. 이제 역사는 당사자인 그를 뺀 살아남은 자들만으로 합의의 문장을 써야 한다.
10월 27일, 정부는 그의 죽음을 국가장으로 예우했으나 국립묘지 안장은 하지 않기로 결정 함으로써 그가 이룬 것들과 그의 과오 사이 지점을 규정했다. 이로써 그가 누락하고 시대가 유예한 사회적 합의는 다시 질문이 되어 돌아왔다. 우리는 노태우에 대해, 반민주적 집권자들에 대해, 공동체 파괴자들에 대해, 특히 국민의 자유와 인명을 가벼이 여긴 자들에 대해, 어디까지 합의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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