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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래도 의정부고 학생들에게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2020년 8월 17일 by 김종현

의정부고 학생들의 흑인 분장과 이를 지적한 샘 오취리에 대한 비난을 바라보면서 별말을 안 한 건 지쳐서다. 내겐 그 장면이 요즘 들어 연이어 터지는 몰지각과 폭력의 마지막 일격이었다. 그즈음에선 어안이 벙벙해졌다.

의정부고의 학생들의 ‘관짝소년단’ 패러디 졸업사진에 인종차별 논란이 일어났다. / 출처: 의정부고 페이스북

물론 젊은 층일 수록 흑인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져 감을 느낀다. 그건 근래의 현상만은 아니고 흑인 음악이 강세를 얻어갈 무렵인 20년 전부터 차츰 굳어갔다. 오히려 흑인의 검은 피부와 근육질 신체를 닮고 싶어 하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흑인을 비하적인 시선으로 보던 그 전 세대와 크게 차이가 났다.

하지만 당시 젊은 세대가 본 흑인은 헐리웃 영화와 뮤직비디오 등 미국 연예 산업이 만들어 낸 상이었다. 따라서 흑인이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를 말하진 않았다. 백인 위주 문화 권력이 소비하는 흑인 상이었기 때문이다.

즉, 한국인이 받아들인 우월한 피지컬과 예술적 능력의 흑인이란 자본과 패권이 앞선 문화권에서 소비되는 특정한 상이었다. 그 상은 전 세계에 실재하는 흑인 일반이 아니었다. 따라서 당사자인 흑인의 입장에선 고유한 자기 존재를 발현할 기회를 타자에게 빼앗기는 일이었다.

아마 힙합이 한국 젊은 층의 문화로 확실하게 자리 잡은 지금은 더욱 거부감이 없을 것이다. 특히 유튜브나 인스타 같은 온갖 매체를 통해 실시간으로 세계를 접하면서 성장해 왔으며, 흑인이 한국의 인구구성에서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지분을 차지하지 않기에 (인종차별과 같은) 문화적 충돌을 겪지 않은 채 차별을 감각할 일 없이 성장한 아이들일수록 자신들이 흑인을 동등하게 바라본다고 여길 것이다. 그랬으니 관짝밈 코스프레를 리스펙트라고 변론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학생들의 리스펙트를 거꾸로 보면, 그들이 매체를 통해 받아들인 ‘세계의 흑인’이란 건 동시대를 사는 흑인들이 곳곳에서의 차별에 어떻게 저항하며 문화권마다 이를 어떻게 정리해 나가느냐를 소거한 ‘선택적 세계관 속의 흑인’이었음을 드러낸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전에 인종차별적 요소에 대한 학습이 돼 있어서 그런 코스프레를 했을 리 없고, 설사 실수로 그러했더라도 정직한 사과만으로 끝냈을 것이다.

즉 그들은 20년 전과 똑같이 하나의 상으로만 흑인을 선별하고 다룬다. 그러니 ‘흑형’이란 말이 왜 기분 나쁜 차별적 언어인지를 알 수 없고, 검은 칠을 한 게 왜 차별인지도 모른다.

학생들은 오히려 피부색을 어둡게 칠하지 않는 것이 역차별처럼 비칠까 우려했다고 한다. / 출처: 의정부고 페이스북

교통사고를 내는 대부분의 사고 가해자는 선량한 이들이다. 누군가를 치어 죽이겠다거나 다리를 부러뜨리려고 사고를 내지 않는다. 그저 저마다 어떤 사유가 있어서 잠시 한눈을 팔았다든가, 잠시 과속을 했다든가, 단지 기분 좋아 노래를 부르다 사고를 낸다.

그런 선량한 운전자가 잠깐의 실수로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를 살짝 칠 수 있다. 설마 그에게 악의가 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살짝 치인 보행자는 “아니 씨X 눈을 얻다 두고 다니는 거야! 사람 죽을 뻔했잖아! 빨간불 안 보여?”라고 소리 지를 수 있다. 너무 놀랐으니까, 상처를 입었으니까, 죽을 뻔했으니까.

그럼 운전자가 할 일은 얼른 나와서 사과를 하고 어디 다친 데 없냐고 물어야 맞다. 속으로는 ‘사람이 너무 욕을 하네….’라고 생각할 순 있어도 당장엔 입 밖에 낼 말은 아니다. 그런데 거기서 운전자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나쁜 놈이란 말이냐. 난 사람에게 친절하고 선의를 가진 선량한 사람이다. 나는 사람을 칠 의도가 있던 게 아니다. 내가 운전하는 게 범죄를 저지르려고 한 거라는 말이냐.

우리 사회는 이런 운전자를 양식 있는 사람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운전자가 그렇게 떳떳하게 떠든다. 거의 모든 차별에 있어서 그렇다. 더욱 놀라운 건 주변의 보행자들이 피해자에게 하는 말이다.

당신은 왜 그렇게 욕을 하는가. 너무 지나치게 소리치는 거 아닌가. 저 사람이 나쁜 의도로 그런 건 아니지 않나. 죽은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야단인가. 혹시 당신 지금 돈 뜯어내려고 그러는 건가.

이 놀라운 장면이 차별이 일어난 모든 곳에서 몇 달간 이어졌다. 샘 오취리는 결국 사과까지 했다. 그동안 가해자는 가만히 있어도 됐다. 그러나 오취리의 과거에 대한 해석은 차별행위를 한 이들의 문제와는 별개의 사안이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한쪽의 명백한 차별행위라는 문제에서 양자 간의 갈등으로 변질했다.

가나 출신 방송인 샘 오취리가 이를 지적했다가 비난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 더 가관인 건 피해자가 자신을 둘러싼 보행자들과 가해자에게 일일이 대응하며 하나씩 짚을 때다. 피해자가

자동차의 스키드 마크를 볼 때 이 사람은 시속 몇 킬로미터로 달려왔으며 몇 미터 앞에서 브레이크를 밟았고 그것은 운전자의 부주의를 뜻하며, 내리자마자 사과는 않은 채 변명으로 일관한 것은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규범 이러저러한 것들과 맞지 않으며 그것은 내게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자, 인간적인 반성과 사과가 중요한데도 이렇게 후안무치하게 나오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함에도 주변의 당신들이 이렇게 구는 것은 범죄를 두둔해 궁극적으론 조장하는 행위이고 몰이성과 후진적인 행태의 전형이다.

라고 말했을 때, 구경꾼인 보행자들은 대개 비슷한 논리를 들이밀며 대응한다.

아무리 그래도 욕을 하면 안 되지. 사람 일이란 게 그렇게 하나씩 다 따질 수 없는 거다. 빡빡하게 짚는다고 해도 그건 네 입장이다. 주변 CCTV를 확인해야 한다. 너만 잘났냐. 후지다 아니다를 네가 왜 판가름하느냐. 그렇게 땍땍거려봤자 누가 네 편을 들겠냐.

대개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교통사고를 당해보지 않았거나, 그럴 위험에 제대로 처해 본 적이 없거나, 건너 들은 사고 경험 외엔 없는 이들이다. 실재하는 위험과 마주쳐본 사람들, 피해를 입어본 사람들, 상처를 받고 영혼의 질식을 경험해 본 사람은 저런 말을 하고 싶어도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는다.

또한 대형 사고를 겪은 후 어떤 지점을 초월해 인간에 대한 해석의 폭이 넓어진 이라면 갈등을 풀기 위해 양측의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힌다고 할 때도 저렇게 말하진 못한다. 자기도 경험해 봤으니까.

무늬로만 세상을 파악하는 무늬만 이성적인 자들의 특징이 바로 경험의 외주화다. 짐짓 점잖은 체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들은 자신의 점잖음을 위해 수많은 이들이 그러모은 피해의 증거가 주장으로 승화된 덕을 본다. 그들이 거기에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은 채 동떨어진 입장을 고수할 수 있는 평온과 안정을 누리는 건, 피해 경험을 무급으로 외주화해 자신의 것으로 착취하는 삶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형태로든 성장 과정에서 그렇게 살아도 될 법한 삶을 살아온 경우에 자주 발현되는 걸 살면서 수도 없이 목격해 왔다. 자신의 아비투스를 건너뛰는 사람은 역시나 흔치 않다. 쉽게 말해 결핍과 결여가 겉으로 드러날 정도의 상흔이 있는 사람들은 피해 경험을 외주화한 사람들처럼 상처를 타자화해 발언하지 못한다. 그 대신 소리를 지른다. 그 대신 욕을 한다. 그 대신 먼저 운다. 살만한 사람들은 살만한 사람으로서의 발언 너머를 감각하지 못한다.

샘 오취리는 “제 의견을 표현하려 했는데 선을 넘었다”며 “학생들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한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사과문을 올렸다. / 출처: 헤럴드 POP

어느 사회나 그렇듯이 무난하고 평범한 삶을 추구하는 평균적인 사회 일반의 시선은 대개 이해의 경계 즈음에 머물러 있기 마련이다. 상처를 입지 않거나 외면해도 될 정도의 수준으로 살고 싶어 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라서다. 그래서 그런 삶을 추구하는 동안 이해가 가 닿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인이 백인 연예 산업의 시선을 흡수해 흑인을 바라보고 그것에 기반해 흑인을 다루면서 흑인이 이를 지적하면 분노하고 반발하는 것과 똑같은 무늬다.

야, 그건 네 생각이지! 우리가 모를 수도 있지, 모른다고 그렇게 말해? 우리도 생각이 다 있다고! 난 너랑 생각이 다르다고!

이게 흑인과 섞여 살지 않는 한국인이 할 수 있는 평균적 목소리, 한국의 자화상이다. 흑인이란 낱말에 피해자를 넣어도 무방하다. 인색함, 그것이 지금 우리의 얼굴이다. 외부의 차별적 시선을 흡수하여 내부의 차별을 감행하고, 내부의 차별에도 차별을 보내고, 그러면서 스스로를 차별하는 이 점층적 액자 구성의 겹들이 사회에 드리워진 걸 보노라면 깊은 탄식만이 나온다.

그나마 희망을 거는 건 모순되게도 의정부고 학생들 같은 청소년들이다. 그들 세대는 나의 윗세대에 완연히 박혀 있었고 내 세대에도 잔재가 남아있던 흑인 비하의 시선이 거의 없는 듯하다. 그냥 ‘스웩 넘치는 친근하고 멋진 까만 형.’ 그런 생각만 하다가 자신들이 몰랐던 기존 세계의 문법에서 금지하던 선과 만났을 것으로 본다.

그들은 철석같이 믿는 것 같다. 자신들이 가치판단 없는 시선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그들에게 문화의 다양한 양태와 깊이를 경험할 어느 정도의 시간만 더 주어진다면 그들 이전 세대보단 훨씬 차별 없는 성인들이 되지 않을까. 차별금지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질 정도로 차별을 떠올리지 않는 사람들의 세상이 혹여 펼쳐지지 않을까. 그러면 지금처럼 말도 안 되는 온갖 방어는 어쩌면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 방어를 하는 사람들도 함께.

물론 현재로선 이건 절망감 앞에서 하는 마지막 기도에 가깝다.

Filed Under: 문화, 사회,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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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다. 실천한다. 반성한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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