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의 날, 함께 무너진 가족 이야기
1997년에 터진 국가부도 IMF 정국과 관련해 가장 인상 깊은 기억으로 남은 기사가 하나 있다. 당시 앳된 청년이던 내가 겪은 곤란은 그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었다.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전국에 실직자가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 한 젊은 부부도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게 됐다. 그들에겐 아직 품에 안고 키워야 하는 어린 아기도 있었다. 살아가긴 살아가야 하는데, 완전히 빈털터리가 된 부부는 갈 곳이 없었다. 양가도 형편이 뻔해 기댈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어느 강가에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1년을 버텼다. 아기도 함께였다. 기사를 읽었던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 부모의 심정이 어땠을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밤낮으로 금이야 옥이야 어르고 달래며 키워야 하는 어린 자식과 함께, 젊은 부부는 한데서 일 년을 살았다. 어느 계절엔 폭우가 텐트를 찢을 듯 두드렸을 것이고, 어느 밤은 이가 딱딱 부딪힐 만큼 추웠을 것이다. 기사에선 아주 짧은 몇 줄이 다였지만, 내게 그 일화는 서글픔과 뭉클함이 격정의 파도가 되어 다가왔다.
당시 가입해 있던 PC통신 동호회에 올라왔던 어떤 작별의 글도 기억난다. 종종 봤던 아이디의 주인은 더 이상 동호회 활동을 할 수 없다며 안녕을 고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주저앉았고, 집은 팔아야 했으며, 가족은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지기로 결정했다. 어떤 희망을 기대하며 그렇게 결정한 게 아니라, 그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글쓴이는 집에 있는 것들 중 돈이 될 만한 모든 걸 팔고 있다고 했다. 그가 사용하던 PC도 팔아야 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작별의 글을 올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 글을 올린 새벽이 지나면 그는 모니터 너머에서 사라져야만 했다.
2020년의 우리가 밤낮없이 SNS에 매 순간을 풀어내고 위안을 받으며 스마트폰과 PC에 애착을 느끼듯, 1997년의 PC통신 사용자들에게도 네트워크 너머의 존재들과 연결된 감정이 있었다. 그걸 끊어야 하는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추측컨대 그 동호회의 특성상 그의 직업은 컴퓨터를 가까이하는 것이었을 텐데, 그는 그런 PC를 팔아야 했다. 떠나보내야 할 그 PC로 마지막 인사를 한 것이다.
광화문 집회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냉정한 시선
IMF 이후로 경제가 조금만 위태로워지면 사람들은 ‘IMF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라는 말을 종종 하곤 한다. 그러나 내 감각에선 그때 이후 지금까지 20여 년 중에 올해의 코로나19 감염병 창궐 상황이 가장 위협적이다.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그때의 재현인 양 모든 사람들의 머리 위에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코로나19 와중에 대규모 집회에 의한 감염확산을 막겠다고 광화문 광장에 차벽이 등장했다. 이걸 두고 사람들이 맹렬히 비판하는 걸 보았다. 물론 정치적 주장을 펼치는 모든 정치집회는 허용되어야 한다. 보수든 진보든 우파든 좌파든 그것은 시민의 권리다. 특별히 공동체를 파괴하자는 주장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스스로 의도가 선하다 여기더라도 그것이 다른 시민들의 안위를 해칠 우려가 있다면, 특히 사람의 생사가 달린 문제가 불거질 우려가 있다면 삼가야 한다는 건 모두가 안다. 주최 측이 그리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나서서 조치를 하는 건 당연하다.
이미 지난 광복절에 있은 보수단체의 광화문 집회는 그 저의가 의심될 만큼 대책 없이 국가 방역에 균열을 부추겼고, 아슬아슬하던 차에 경제와 삶이 더욱 냉랭하게 얼어붙는 경험을 우리 모두에게 안겼다. 이로 인해 보수단체의 광화문 집회는 단순한 정치적 주장을 넘어 정부의 강경 대응을 이끌어내 정치 쟁점화 시키려는 정치적 모략으로까지 읽히는 상황이다.
여론조사를 할 때마다 절대다수라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 집회를 반대하는 건 그저 질병 확산의 우려 때문만은 아니다. 어쩐지 의료 방역을 정쟁의 지렛대로 삼으려는 표정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시대를 처절하게 버텨내는 자영업자의 시선으로는
대부분의 국민은 광화문에서의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반대한다. 집회참가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민주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반대하는 게 아니다. 수개월간의 경험과, 역학조사 결과와, 과학적 근거 때문에 반대한다. 본질적으로는 감염 확산이 우리 모두의 삶을 하루하루 처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동안 옅은 희망이나마 보일 듯했던 시기에 느닷없이 불어난 확진자 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바닥인 줄 알았던 곳에서 한 번 더 굴러떨어졌다.
10년 넘는 동안 크고 번듯하게 요리주점을 키워 놓은 자영업자 내 친구는 올해 초 가게 내외부를 싹 리뉴얼했다. 때가 되어 요리와 상호를 바꾸고 한 단계 더 도약할 심산이었다. 큰돈을 쓴 것으로 안다. 그러나 공사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코로나19가 터졌다.
집안 형편이 나쁘지 않음에도 집안에 손 내미는 걸 싫어해 20대 초반부터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져 온 친구다. 영등포 뒷골목에서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현장을 눈앞에서 경험했고, 많은 자영업 사장님들이 그렇듯 가게를 낸 뒤로는 무용담에 가까운 별별 곤란을 홀로 헤쳐왔다. 나는 그를 코로나 따위 잘 헤쳐나갈 강심장으로 안다.
레저와 탈 것을 좋아하는 잘나가는 사장님인 그 친구는 얼마 전 타고 다니던 고급 차를 팔았다. 대신 스쿠터를 탄다. 그리고 그 스쿠터로 쿠팡 배달을 한다. 지난 3개월간 누적 적자가 1억 5천만 원이라고 했다. 큰돈을 만지면 큰돈에 감각이 없어진다지만, 1억 5천만 원은 동네 골목에서 마주치는 개 이름이 아니다. 가게에 달린 종업원들의 급여와 노모를 생각하면 일 원 한 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처분한 차 값은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한다.
나는 요새 그 친구가 가끔 카톡으로 보내는 시간대별 몇천 원 배달 수수료를 보면 밍숭맹숭한 내가 부끄러워져서 ‘조금만 버텨라. 내가 크게 성공해서 너 어려울 때마다 든든하게 지원해주마’ 같은 객쩍은 농담으로 모면하고 만다.
IMF 땐 사회안전망의 미비로 걸인이 되고 폐인이 되고 행려병자가 되고 자살한 사람들의 숫자가 어마어마했다. 그 경험이 약이 돼 지금은 그때보단 조금이나마 안전한 세상이 됐다. 그러나 지금도 이 나라의 절대다수가 코로나19로 인해 삶에 위협을 느낀다.
예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희대의 감염병 시대를 맞아 가족이, 삶이, 내일이 위기의 구렁텅이로 빠져든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 환란을 반복적으로 경험해왔기에 단지 침묵하고 버틸 뿐이다.
단순하게 들리겠지만 사람의 행복은 채워진 위장에서 온다. 위장이 쪼그라들면 뇌도 쪼그라든다. 그러면 심장이 굳고 입이 다물어지고 눈을 내리깔게 된다. 코로나19의 감염 확산은 우리의 경제를 얼어붙게 만들고 위장을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내몰린다는 위축감은 서민일수록 농도가 짙다. 그러니 감염을 막고 돈을 돌게 해서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부터 살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지금 국가가 수행해야 할 최선의 임무다.
당신의 민주주의는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
광화문 집회에 등장한 차벽이 민주주의를 제약하는 불손한 행위의 일단이라고 비아냥거리고 이를 갈며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민주주의는 어디에 뿌리가 있는지 궁금하다. 수년간 어떤 정부욕을 하든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던 정부가, 국민 다수의 삶과 행복을 좌지우지할 의료와 경제의 편익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집회를 원천 차단한다.
이 두 지점을 가장 짧은 선으로 그은 직선을 연장시켜서 가리키는 방향이 시민 개개인의 자유롭고 안온한 삶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것이 시민이 주인인 민주주의의 가치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 공화국은 존재하는가.
나는 요즘 강가에 텐트를 짓고 일 년을 버텼다던 젊은 부부를 자주 떠올린다. 그들은 그때도 우리 곁의 누군가였고, 지금도 우리 곁의 안 보이는 곳에 있다. 그런 삶을 살지 않았더라도, 그런 삶의 목격담을 접하지 않았더라도, 그런 삶이 있을 수도 있다는 냉엄한 가능성 앞에서 우리는 겸손함을 잃으면 안 된다.
제 딴엔 입바른 말 한다며 현실의 공기를 뺀 진공 속에서 어긋난 균형감만 믿고 누군가는 겪고 있을지 모를 곤궁과 위기감을 소거해선 안 된다. 바로 거기서부터 당신들이 그렇게 우려하는 민주주의의 훼손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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