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서의동 기자가 번역한 요시미 슌야의 『헤이세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하 『헤이세이 30년』)을 봤다. 헤이세이는 일본의 제125대 천황 아키히토의 재위 기간인 1989–2019년의 연호를 의미한다. 하필 일본의 장기침체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저자 요시미 슌야는 천황 재위 기간과 시대 구분은 원칙적으로, 당연히 별개의 것이지만, 이 시기의 사건들을 정리해보는 차원에서 사용한다고 양해를 구한다.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4개의 쇼크를 다룬다. ①경제쇼크 ②정치쇼크 ③사회쇼크 ④문화쇼크다. 앞뒤로 서론과 마무리 글이 붙는 방식이다.
재작년에 재밌게 봤던 책 중에 『피크 재팬』이 있는데, 그 책의 구성과 거의 비슷했다. 『피크 재팬』의 경우 ①2008년 경제쇼크(리먼 사태) ②2009년 정치쇼크(민주당의 집권) ③2010년 외교안보 쇼크(중국과의 쇼카쿠 열도 분쟁) ④2011년 정체성 쇼크(동일본대지진)의 4가지 사건을 다룬다. 『헤이세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과 『피크 재팬』의 서술구조는 매우 흡사했다.
다만 『피크 재팬』에서 다루는 정치쇼크는 2009년 민주당의 집권과 실각이다. 반면 『헤이세이 30년』에서 다루는 정치쇼크는 1993년 비자민 8당파의 호소카와 내각 출범이다. 이후 자민당-사회당-사키가케의 3당 연립에 기반한 사회당 무라야마 내각의 출범, 고이즈미 내각의 출범 등을 연이어 다룬다. 즉 1990년대 중후반, 2000년대 초반의 일본 정치에 더 비중을 두었다. ③사회쇼크 ④문화쇼크는 당대 일본의 사회적·문화적 사건을 다룬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은 경기 활성화 차원에서 금리를 팍팍 내렸다. 자산 거품이 크게 발생했다. 자산거품을 잡기 위해 1989년 금리를 팍팍 올렸다. 1989년 5월 기준금리는 2.5%였다. 이것을 4.25%로 올렸다. 금리 인상분은 1.75%p였다. 문제는 이 시기에 ‘3% 소비세’를 신규 도입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경기위축 정책과 경기위축 정책을 겹치기로 도입한 셈이다.
저자인 요시미 슌야는 일본 전자 산업의 실패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실패의 제1요인은, 일본의 주요 전기산업이 TV 시대의 종언과 모바일형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던 점이다.
- 67쪽
1990년대 일본 정치의 ‘55년 체제’가 붕괴한다. 55년 체제란, 자민당의 압도적 우위와 사회당의 견제 구조를 의미한다. 1.5당 체제였다. ‘55년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는 사건은 1988년 6월에 발생한 리쿠르트 사건이다. 리쿠르트 사건 이후, 정치개혁 요구가 강해지고, 선거제도 개혁, 정치자금 개혁 등이 쟁점화된다.
1993년 7월 총선을 앞두고 자민당 개혁파 일부가 탈당한다. 자민당 개혁파의 수장 중 한 명은 오자와 이치로였다. 결국 총선에서, 자민당 과반이 무너진다. 총선 이후, 자민당 분당을 주도했던 오자와 이치로의 리더십에 기반해 비자민 8당파의 연립정권이 등장한다. 무지개 연합이라 불린다. 호소카와 정권의 출범이다. 이들의 핵심 미션은 선거제도 개혁이었다.
논란 끝에 1994년 3월, 선거제도가 개혁된다. 개혁 내용의 핵심은 ‘소선거구제 + 비례대표 정당명부식 병립제’의 도입이다. 이후 비자민 8당파 연합은 붕괴한다. 자민당의 적극적 공작으로 인해, 1994년 6월 자민당-사회당(일부)-신당 사키가케의 3자 연합 정권인 무라야마 내각이 출범했다. ‘무라야마 담화’로 유명한 바로 그 무라야마 총리다.
사회당의 분당이다. 무라야마 총리는 국회 취임 연설에서 ①자위대 합헌 ②일미 안보조약 인정 ③일본 국가와 국기 인정의 입장을 밝힌다.
1989–1991년 동독, 동유럽, 소련의 붕괴로 인해 냉전이 해체됐고, 좌파 계열 노동조합의 입지가 좁아졌고, 선거제도 개혁이 일어난 상태에서 사회당의 사회경제적 토대는 매우 좁아진 상태였다. 진보 성향 유권자 입장에서 무라야마 총리의 국회 취임 연설은 ‘사회당의 변절’을 의미했다. 55년 체제 이후 사회당이 주장했던, 사회당의 존립 근거에 가까웠던 핵심적인 외교안보 노선을 막상 집권 연정에 참여하자 헌신짝처럼 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①냉전 해체 + ②노조의 변절 + ③선거제도 개혁 + ④기존 사회당 노선을 배반하는 무라야마 총리의 국회 취임 연설은 사회당의 완전한 해체를 초래한다. 사회당은 자민당에 대한 반대당이 존립의 근거였다. 그러나, ①국제적 환경변화 + ②지지기반의 변화 + ③정치제도적 변화 + ④이데올로기와 노선의 변화… 4가지 쇼크가 발생하자 결국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다.
결과적으로 볼 때, 1988년 발생한 리쿠르트 사건과 1993년 비자민 정권교체와 1994년 선거제도 개혁은 ‘55년 체제의 해체’를 초래한 게 맞다. 다만 ‘자민당의 여당 중심 체제’를 붕괴시킨 게 아니라 ‘사회당의 야당 중심 체제’를 붕괴시켰다. 소선거구제+병립제 도입 이전 일본의 선거제도는 ‘중대선거구제’였다. 결과적으로 중대선거구제의 최대 수혜자는 사회당이었다는 것이 사회당의 해체를 통해 입증된 셈이다.
흥미로운 그래프 몇 개를 정리해본다
1990년대 일본의 1인당 명목 GDP는 홍콩을 상회했다. 그러나 2014년경에 홍콩이 일본을 제친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왕창 내리고 거품이 발생하자, 한꺼번에 다시 왕창 올렸음을 알 수 있다. 1989년 2.5%였던 기준금리를 1990년 무려 6.0%까지 올렸다. 기준금리를 단기간에 왕창 내리는 것도 안 좋은 정책이고, 단기간에 왕창 올리는 것도 안 좋은 정책이다. 금리인상(인하)와 실물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시차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거품 붕괴는 주식, 부동산, GDP 순서로 진행된다. 순차적으로 1989년, 1990년, 1991년이다. 1991년 거품 붕괴 이후, 1990년대 중반이 되면서 점차 회복 조짐을 보인다. 그런데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가 발생한다. 그래프를 보면 일본 전자 산업의 생산액 그래프가 급격히 추락하는 분기점이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후임을 알 수 있다.
훗날의 경제적 전개까지를 모두 고려해볼 때,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로 인한 타격은 한국보다 일본이 훨씬 더 크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1990년대 초반과 후반을 통해, 거품 붕괴 + 내부 개혁 실패 + 외부적인 경제충격의 3가지 사건을 동시에 겪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사회당, 민주당 등 야당이 집권하면 여지없이 대지진이 발생했다. 1995년 1월 한신 대지진은 무라야마 내각의 집권기다. 무라야마 내각은 자민-사회-신당 사키가케의 3당 연립내각이었다.
2009년 민주당이 집권했다. 아주 오랜만의 정권교체였다. 그러나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다. 지진, 해일, 후쿠시마 원전 누출이 동시에 발생했다. 결국 2012년 자민당이 재집권하고 아베 내각이 출범했다.
원문: 최병천의 페이스북
이 필자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