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직후 사 놓고, (매우 보고 싶었으나) 다른 일 때문에 미루어뒀던 『반도체 투자 전쟁』을 드디어 봤다. 저자는 김영우 SK증권 리서치센터 이사다. 책을 보면 알겠지만, 반도체 산업을 매우 잘 아는 ‘에이스 of 에이스’다. 반도체 산업을 잘 모르는 사람도 부담 없이 볼 수 있다. 군더더기를 최대한 덜어내고, 핵심 요지 중심으로 잘 정리된 책이다.
약 260쪽 분량인데, 그래프가 많이 포함되어 있어 체감 분량은 더 짧다. (체감 분량은) 약 200쪽에 가깝다. 제목은 『반도체 투자 전쟁』이지만 실제 내용은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전쟁을 다룬다. 출판사가 일부러 ‘투자’와 관련된 느낌을 주려고 잡은 제목인 듯하다. 전체 목차도 매우 깔끔하다. 즉 책 전체의 구조가 잘 정리되어 있다. 총 9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 1–3장은 ‘서론’에 해당한다.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이 시작된 배경(1장)과 반도체 산업의 개요(2장)를 다룬다. 3장은 ‘중국의 제조 2025’와 ‘두 개의 100년’을 다룬다. 둘은 모두 중국이 ‘세계 최강대국’이 되기 위한 플랜의 연장이다.
- 4–6장은 중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미국의 공격(4장), 미국의 공격 이후, 중국의 대응 및 자구책을 다룬다. ‘중국의 2차 반도체 굴기’다(5장). 6장은 ‘미국의 반도체 굴기’를 다룬다. 미국은 반도체 설계(팹리스) 역량은 매우 뛰어나지만, 제조/생산은 매우 취약하다. 이를 만회하는 미국 정부의 대응(산업 정책)을 다룬다.
- 7–9장은 그래도 남는 미국 반도체 산업의 약점과 개선 과제(7장), 미국과 중국 반도체에 대한 개괄적 전망(8장), 향후 주목해야 할 관전 포인트(9장)를 다룬다.
반도체 산업은 크게 ①메모리 반도체 ②시스템 반도체로 구분할 수 있다.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메모리 반도체의 시장 비중은 약 33%다. 나머지는 시스템 반도체다. 메모리 반도체의 기능은 정보의 ‘저장’이다. 시스템 반도체의 기능은 정보의 ‘처리’다. 메모리 반도체는 소품종 대량생산이고, 시스템 반도체는 다품종 소량생산이다.
삼성은 메모리 시장에서 세계 최강자이고, 시스템 반도체 파운드리 분야 최강자는 TSMC다. 삼성은 시스템 반도체에서도 TSMC 추격을 위해 노력 중이다. 시스템 반도체의 경우, 업무 분장의 관점에서 4개의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 IDM(종합반도체 회사, 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 설계와 제조를 같이 하는 경우
- 팹리스: 반도체 설계만 전담하는 경우
- 파운드리: 외부업체가 설계한 반도체 제품을 위탁받아 제조/생산만 전담하는 경우
- OSAT(Outsourced Semiconductor Assembly and Test): 파운드리에서 생산한 반도체 칩을 연결 및 조립, 테스트하는 경우 (=후처리 공정)
반도체의 설계와 제조를 같이 하는 IDM 회사는 많지 않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인텔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설계를 전담하는 팹리스 회사가 발달해있다. 팹리스는 퀄컴, 엔비디아, AMD, 화웨이의 자회사인 하이실리콘 등이 해당한다. 독자적인 운영체제와 클라우드를 보유한 업체들은 팹리스 진입에 유리하다. 애플, 구글, 아마존, 알리바바, MS 등이 추가로 진입 중이다.
파운드리는 대만의 TSMC와 삼성전자의 글로벌 2강 체제다. 특히 두 기업은 고기술, 고성능 반도체에서 압도적인 능력을 보여준다. 미국 정부의 강력한 지원으로 인텔이 진입할 경우 글로벌 3강 체제 가능성이 있다.
덩샤오핑이 자신의 사후 100년을 내다보고 강조한 삼보주(三步走)가 매우 흥미롭다. 삼보주는 ‘경제 대국을 위한 세 가지 발걸음’을 의미한다.
- 제1보는 원바오(온포, 縕袍)다.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해결한 상태’를 의미한다. 절대빈곤 타파와 유사하다. 덩샤오핑은 1979년~1999년까지의 20년 과제로 잡았다.
- 제2보는 샤오캉(소강, 小康)이다. 샤오캉은 ‘그럭저럭 먹고살 만한 상태’를 의미한다. 중산층과 유사한 의미다. 덩샤오핑은 2000년부터 2021년까지의 20년 과제로 잡았다.
- 제3보는 다퉁(대동, 大同)이다.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사는 인민의 낙원’을 의미한다. 덩샤오핑은 이를 2022년부터 2049년까지의 약 25년 과제로 잡았다.
최근 시진핑이 강조하는 ‘공동부유론’ 역시 덩샤오핑의 제3보에 해당하는, ‘대동 사회’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덩샤오핑의 삼보주(三步走) 전략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것이 ‘두 개의 100년’이다.
첫째, 2021년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다. 중국공산당은 이 시기를 ‘전면적 샤오캉 사회’가 실현되는 기점으로 잡았다. 둘째, 2049년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0주년이다. 중국몽(中國夢)이 실현되는 시점이기도 하고, 덩샤오핑의 구분법에 의하면, 제3보주인 다퉁(대동사회)가 실현됨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는 덩샤오핑의 ‘두 개의 100년’과 시진핑의 ‘두 개의 100년’은 약간 다르다고 지적한다. 덩샤오핑의 경우, 인민들의 소득향상에 강조점이 있었다. 시진핑은 ‘중국의 군사 강국화’에 강조점이 있다고 본다. 시진핑은 2013년 집권한다. 2015년 ‘중국 제조 2025’가 발표된다. 두 개의 100년, 중국몽, 중국 제조 2025년은 모두 ‘중국의 군사강국화’와 맞물린 프로그램이다.
2018년경에 중국 GDP는 미국의 70% 수준에 도달한다. 2028년경이면 총 GDP에서 중국이 미국을 앞설 것으로 전망한다. 패권 경쟁에서 당연히 미국의 경계심은 강해질 수밖에 없다. 중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미국의 공격이 시작되는 이유다.
『반도체 투자 전쟁』이 주는 최대의 매력은 미국-중국의 반도체 패권 전쟁의 전체 조감도(鳥瞰圖)를 체계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4장은 미국의 공격, 5장은 미국의 반도체 굴기, 6장은 중국의 2차 반도체 굴기를 다루고, 7장은 그래도 남는 미국의 약점을 다룬다. 논리적 흐름으로 보면, 미국의 중국 공격 → 미국의 자체역량 강화 → 중국의 응전 → 그래도 남는 미국의 약점을 다룬다.
미중 반도체 패권 전쟁의 본질은 미래기술의 주도권 다툼이다. 미래기술의 주도권은 향후 경제적 우위와 군사적 우위 모두를 의미하게 된다. 저자는 흔히 4차 산업혁명으로 표현되는 미래기술의 핵심을 인공지능에 기반한 자동화(RPA, Robotic Process Automation)로 본다. 그러자면 빅데이터, 인공지능, 클라우드, 블록체인 기술이 필수적이다. 5G 통신 인프라와 모바일 엣지컴퓨팅(MEC, Mobile Edge Computing) 인프라가 경쟁력을 좌우하게 된다.
중국 입장에서 ‘미래기술’의 중요한 축에 해당하는 5G + 모바일 엣지컴퓨팅(MEC)에 근접한 기업이 화웨이와 화웨이의 반도체 자회사인 하이실리콘이었다. 중국은 ‘통신 분야’에서 미국보다 기술적으로 앞서 있다. 그 선두에 화웨이가 있었다. 화웨이는 통신 장비 회사 1위,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 1위, 5G 통신을 미리부터 준비했다. 미국이 화웨이 제재를 하지 않았다면, ‘글로벌 표준’을 화웨이가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이실리콘은 2015년에 파운드리 반도체 분야에서 글로벌 Top 10 안에 들어왔다. AP 반도체 시장에서는 글로벌 3위까지 올라왔다. 칭화대가 출자해서 만든 칭화유니그룹의 자회사인 SMIC 역시 파운드리 역량을 키우던 중이었다. 미국은 화웨이, 하이실리콘, SMIC를 조준 타격했다. 인공지능 및 클라우드 역량과 연결되는 5G 통신, 하이엔드 반도체 파운드리 역량을 공격한 것이다.
미국의 ‘중국에 대한 반도체 공격’이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국이 반도체의 글로벌 밸류 체인에서 독보적인 비교우위 분야를 갖기 때문이다. 미국은 글로벌 밸류체인의 상류에 해당하는 반도체 장비에서 세계적인 비교 우위를 확보했다. 그리고 (구글, 애플, 퀄컴, 브로드컴 등) 미국 기술에 기반한 반도체 칩, 특허 라이센스 등을 가졌다. 미국은 이런 기술적 우위를 근거로 다른 나라 기업들에게도 제재 동참을 압박했다.
미국이 중국 반도체 기업에게 ‘실질적 타격’을 입힌 방법은 크게 4가지였다.
- 첫째, 미국의 반도체 장비를 화웨이, 하이실리콘, SMIC에게 공급하지 않는 것이다.
- 둘째, 미국의 화웨이 제재에 영국의 대표적인 ‘반도체 설계업체’인 ARM이 제재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ARM은 AP 반도체 업계에서 기술의 글로벌 표준을 선도하는 기업이다. (p.104~105)
- 셋째, 노광장비를 글로벌 독점 공급하는 네덜란드의 ASML이 EUV(극자외선 노광장비)의 중국 기업 공급 금지에 합류했다. 나노미터 수준의 고급 반도체 기술은 ASML의 노광장비 공급이 필요한데, 이를 금지한 것이다. (*ASML 입장에서도 미국의 반도체 장비 지원이 필요하다.)
- 넷째, 미국이 대만의 TSMC에게 중국 기업에 대한 공급중단을 요청했고, TSMC가 이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TSMC는 파운드리 시장에서 최대 점유율을 차지한다. 미국의 요구를 듣지 않으면, ‘미국산 반도체 장비 공급’의 중단 가능성이 존재한다. (*중국 공급을 중단했지만, TSMC의 미국 매출 및 전체 매출은 오히려 늘었다.)
미국의 화웨이 제재는 익히 알려진 내용이다. 다만 전체적인 조감도(鳥瞰圖)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미국의 반도체 굴기 부분이다. 반도체의 역할 분담을 ①설계(팹리스) → ②제조(파운드리) → ③조립•검사(OSAT)로 구분하면, 미국은 설계역량에 집중되어 있다. ②제조의 경우, 대만의 TSMC와 한국의 삼성전자 의존도가 매우 높다.
만일, 중국이 대만을 점령하게 될 경우, 미국은 치명적인 산업적 타격을 입게 된다. 2020년 미국 국방부와 랜드연구소의 대만 충돌과 관련된, 미국과 중국의 ‘워게임’을 실시했는데, 놀랍게도 미국에게 불리한 것으로 나왔다.
다르게 말하면, 중국의 대만 침공을 미국이 군사적으로 막지 못하게 될 가능성도 꽤 된다는 의미다. 대만이 중국에 점령될 경우, 미국의 반도체 및 산업 전체가 궤멸적 타격을 입게 된다. 반도체 제조 역량이 미국 국내에는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TSMC와 삼성전자의 ‘미국 내 공장 설립’을 요청하고, 역대 최강의 세제 혜택을 담은 반도체 활성화 법안을 통과시킨 이유다.
다른 한편, 미국은 ‘자국의 파운드리 업체’를 키우기 위해 인텔의 진출을 독려하는 중이다. 미국의 1차적인 목표는 반도체 생산 능력의 국내 자립기반 구축이다. 동시에 중국의 하이엔드 반도체 역량은 조준 타격하고, 지속적으로 감시/견제하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전쟁은 기술 전쟁이며, 패권 전쟁의 성격을 갖는다. 2028년을 전후한 시점에 중국의 GDP가 미국을 따라잡게 될지언정, 미국으로서는 최대한 중국의 ‘기술 첨단화’를 저지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대응은 아직까지는 뾰족하지 않다. 중국은 ‘설계역량’은 상당 수준에 이르렀지만, ‘제조역량’ 기술은 낮은 축에 속한다. 그러나 미국의 반도체 기술봉쇄를 고려할 때, 중국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반도체 고급 기술의 자립화밖에 없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는 없다.
최근 언론 기사를 보면 SMIC가 ‘중고 반도체 장비’를 닥치는 대로 다 사들인다는 내용이 나온다. 정황으로 보아, 중국 정부는 SMIC가 ‘낮은 기술’에서 ‘중간 기술’로, 그리고 다시 ‘고급 기술’로 최대한 빨리 학습할 수 있도록 대규모의 자금지원을 하려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의 화웨이, 하이실리콘, SMIC 공격으로 집약되는 미-중 1차 반도체 전쟁은 미국의 압승으로 끝났다. 중국의 통신-반도체 산업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미국의 통신-반도체 산업은 반사이익을 누리게 됐다. 인공지능에 기반한 자동화와 5G 인프라, 모바일 엣지 컴퓨팅(MEC) 인프라 모두에서 미국은 중국에게 ‘빅엿’을 먹인 꼴이다.
『반도체 투자 전쟁』은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전쟁’을 전체적으로 조감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책은 없을 정도로 좋은 책이다.
원문: 최병천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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