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가극단 다카라즈카(宝塚)
다카라즈카 극단은 일본의 미혼 여성으로만 구성된 극단이다. 본래 효고현 다카라즈카시라는 도시에서 한큐 전철이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시작한 공연에서 유래했는데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하나의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1913년에 창단했다고 하니 무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작년쯤이었나, 히비야 근처를 걸어가다가 약간 상기된 표정을 한 사람들이 건물 앞에 삼삼오오 모여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무슨 이벤트가 있는지 궁금해서 건물을 쓱 보았더니 남장을 한 여자 배우를 앞세운 기묘한 포스터가 보였다. CG도 아닌 듯한데 이런 진한 화장은 왜 한 것이며, 이게 2020년대 공연의 포스터가 맞는지 혼란스러웠다. 이 공연을 보려고 이렇게 다들 대기를 하는 건가?
다카라즈카 가극을 그렇게 처음 알게 되었고, 조금 알아보니 일본인들조차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할 만큼 탄탄한 팬층을 보유했더라. 여성만으로 구성된 가극단이라는 콘셉트 자체도 특이한데 이것이 또 소수만이 향유하는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니. 일반 뮤지컬도 있고 연극도 있는데 사람들이 굳이 다카라즈카를 찾는 이유가 뭘까.
극단 입단의 필수 코스, 다카라즈카 음악학교
다카라즈카 극단의 단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효고현에 있는 다카라즈카 음악학교를 졸업해야 한다. 예과와 본과로 구성된 총 2년 과정으로 커리큘럼이 구성되어 있으며 연기, 댄스, 노래 등 다카라즈카 배우(일명 다카라젠느)가 되기 위해 필요한 훈련을 받는다. 음악학교에 입학하는 정원은 한 해 40명으로 정해져 있는데 평균적으로 약 20 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인다. 만 14세에서 18세 중학교 졸업(예정)자에 한해 응모 자격이 주어지며 총 4번까지 응시할 수 있는데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재수생도 흔하다고.
다카라즈카 음악학교 합격자 발표 장면은 지역 언론에 매년 보도될 만큼 큰 이벤트다. 그렇다, 신박한 기술이 난무하는 요즘 시대에 다카라즈카 음악학교 합격자 발표는 재학생들이 합격자 수험 번호가 적힌 게시판을 직접 들고 나와 펼치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진행된다.
다카라즈카 음악학교 합격자 발표.
선배들이 직접 명단을 펼치는 순간 자신의 수험 번호를 확인하고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 음악학교 지원자들이 꿈에 그리는 로망 중 하나이기도 한 것 같고, 예전부터 이어져 오는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쪽 문화를 고려해 볼 때, 예전 방식으로 돌아갈 거라는데 난 500원을 걸겠다.
불문율로 전해져 내려왔다는 음악학교의 교칙을 들어보면 어떤 면에서는 군대보다 더 엄격한 듯하다. 다카라즈카 극단과 음악학교를 운영하는 한큐 전철을 타고 이동할 때는 전철에 본과생이 탔을 수도 있으니 예과생들은 전철이 플랫폼을 빠져나갈 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고… 한다. 특별한 예외 사항이 없다면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며, 본과생의 말에 예과생은 네(はい), 아니요(いいえ) 두 가지로만 대답해야 했다고. 이러한 문화가 시대착오적이라는 지적이 나오자 학교 측에서는 폐지한다는 입장을 최근에 냈다.
본과생과 예과생을 1:1로 매칭해서 지도하는 제도도 겨우 폐지되었는데, 예과생은 아침마다 본인이 맡은 구역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본과생의 검사를 맡아야 했다고 한다. 2016년 즘 한 예과생에게 건강 이상 문제가 생겼고, 이후 예과생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1:1 멘토링(?) 대신 선배와 후배 모두 그룹 단위로 매칭을 하는 쪽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다카라즈카가 표방하는 ‘맑게 바르게 아름답게’ 정신에 걸맞은 다카라젠느를 양성하는 음악학교. 아무리 엄격하고 힘든 과정이라도 기꺼이 훈련을 받고 다카라즈카 극단에 데뷔하기 위해 한 해에도 몇백 명의 소녀들이 이곳의 문을 두드린다.
다카라즈카 음악학교 입학식 풍경.
1등만 빛나는 톱스타 시스템
다카라즈카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톱스타 시스템이다. 다카라즈카 가극단은 꽃, 달, 눈, 별, 우주의 이름을 딴 다섯 개 조와 베테랑 배우들이 활약하는 전과(専科) 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의 다섯 개 조에는 일명 ‘톱스타’가 존재한다.
가장 인기 있고 유명한 배우라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톱스타가 아니라 공식적인 타이틀을 받고 재임 중 고정으로 모든 공연의 주연 역할을 독차지하는 ‘톱스타’이다. 각 조에서 실력이 출중하고 스타성을 겸비한 남자 역할을 담당하는 단원이 톱스타 자리에 오르게 되며 이들은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자랑하며 다카라즈카의 간판스타 역할을 한다.
톱스타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입단 후 단계적으로 승급을 해야 하는데, 톱스타 임명은 다카라즈카 인사부에서 실력과 인기 등 종합적으로 검토해 내부적으로 결정한다고 한다. 사사로운 것도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에게는 위화감 없이 다가올지 모르지만, 무대 위에서의 역할 및 비중을 이런 계급 시스템으로 관리한다는 게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주연 배우로 발탁되는 과정이 인맥 같은 외부적인 요소의 개입 없이 오직 그 사람의 역량만으로 결정된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공정하다 해야 할지 이거 참.
보통 입단해서 12–15년 후에 톱스타로 올라서게 되며 2–5년 정도 톱스타로 활동한 후에 극단을 은퇴하게 된다는데 퇴단 후 연예계로 옮겨가 활동을 이어나가는 경우도 많다. 다카라즈카 톱스타 출신 가장 유명한 배우는 〈여왕의 교실〉로 유명한 아마미 유키로, 그녀는 극단에 입단하고 나서는 보통 12년이 걸리는 톱스타 자리를 6년 반 만에 꿰찬 전설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직접 경험해 본 다카라즈카
작년에 다카라즈카에 관해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표를 구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 한동안 존재를 잊었다. 일본에 사는 대학 동기를 만나기 전까지. 친구는 대학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공연 업계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더니 그게 설마 다카라즈카 극단일 줄이야.
친구는 내가 격한 관심을 보이며 표를 구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자 기꺼이 추첨에 넣어 보겠다고 했다. 다카라즈카 팬클럽 같은 곳에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어야 응모가 가능한데 직원 우대 같은 건 전혀 없다고 한다. 본인도 똑같은 돈 다 내고 추첨에 당첨이 되어야 겨우 본다며.
2,000석이 조금 넘는 극장의 좌석은 SS, S, A, B 순으로 네 등급으로 구분되는데 각각 가격은 12,500엔, 9,500엔, 5,500엔, 3,500엔이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공연이니 이왕이면 좋은 자리에서 보자 싶어서 SS석 반, S석 반으로 추첨을 넣어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가장 비싼 SS석은 따로 선행 추첨이 끝난 상태라고 했다. S석으로 응모한 자리가 운 좋게 당첨이 되었고 랜덤으로 배정받은 자리도 비교적 앞자리여서 다행히 배우들의 표정이 다 보일 거라고 했다.
수요일 오후 1시 반에 시작하는 공연을 보기 위해 오후 반차를 내고 회사에서 바로 히비야 미드타운 옆에 있는 다카라즈카 극장으로 향했다. 관객석은 정말 단 한자리의 빈자리도 보이지 않는 만석 상태였다. 예상대로 대부분의 관객은 여성이었는데 연령대는 젊은 여성들부터 할머니들까지 비교적 다양했다. 평일 낮에 이 정도 규모의 관객을 모을 수 있는 집객력이라니, 가득 메워진 관객석을 둘러보며 다카라즈카의 인기를 실감했다.
공연은 중간에 30분 정도의 브레이크 타임을 포함해 3시간가량 진행되었다. 1부는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었는데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베르사유의 장미〉처럼 익숙한 작품이었으면 좋았으련만, 등장인물도 많고 대사에 쓰이는 어휘도 익숙하지 않다 보니 내용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대략 폭정을 휘두르는 아이즈 번의 번주로부터 도망친 가신들이 검객들에게 납치당하고, 피신해 있던 여자들에게도 복수의 손길이 뻗치자 천재 검사가 나타나 이들에게 무예를 전수해 주어 원수를 갚게 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주연 배우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등장할 때마다 관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고 대사를 하는 도중에 간간이 웃음소리도 들렸다. (얼마나 찐팬들일까. 다카라즈카 첫 경험자인 나와 함께 공연을 보러 간 일본어 선생님은 그저 어리둥절) 이날 공연을 한 별조(호시구미)의 톱스타는 ‘레이 마코토’인데 천재 검사로 등장해 칼을 마구 휘둘렀다.
단체로 칼을 휘두르는 일본 무사의 모습이 어쩔 수 없이 조금 거북하게 느껴지는 것도 있고, 권선징악의 틀에 맞춘 스토리 역시 조금 밋밋했지만, 그럼에도 공연을 보니 다카라즈카의 매력이 뭔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눈 앞에 펼쳐지는 무대의 시각적인 임팩트가 강렬했다.
좌석이 무대와 가까워 배우들의 의상 디테일이 다 보였는데 하나같이 얼마나 정성스럽게 만들어졌던지. 고급스러운 소재에 한 땀 한 땀 손수 자수를 놓고 장식을 단 듯했다. 표정 연기보다 의상 디자인을 뜯어보게 될 정도로 공을 많이 들인 티가 났다. 나중에 알아보니 실제로 배우들이 입는 옷은 다카라즈카 극단 내부의 의상 디자인팀에서 모두 손수 제작한다고 한다. 의상뿐 아니라 무대 디자인 역시 인상적이었다. 내용을 잘 따라가지 못해도 이런 비현실적인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지니 금방 시간이 지나갔다.
1부 공연이 끝나고 쉬는 시간 안내 방송이 나오자 다카라즈카 팬들은 우르르 굿즈 숍으로 기념품을 사러 나갔다. 팬덤이 대단하다. 2부 공연은 스토리가 있는 1부의 뮤지컬과 달리 댄스와 노래가 중심이 되는 레뷰(レビュー) 공연으로 진행되었다. 막이 오르자 무대 위에 설치된 초대형 계단 위,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젠느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스케일과 화려함에 압도되어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젠느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의상으로 갈아입고 등장하며 노래를 부르고 퍼포먼스를 보였다. 이 레뷰 공연에서도 톱스타가 센터 자리에서 가장 큰 비중을 담당하는 것은 물론 의상부터 다른 단원들과 구분되었다. 중간에 한 마리의 새로 분장해 등에 커다란 깃털을 가득 꽂고 나타났을 때에는 화려함이 과하다 싶었는데 같은 생각이었는지 옆에 앉은 선생님과 눈이 마주쳐 빵 터져 버리고 말았다.
중간에 조성모의 〈아시나요〉를 부르기도 했는데, 처음 ‘아시나요’는 한국어 그대로 부르고 나머지 가사는 일본어로 개사한 버전으로 불렀다. 다카라즈카에서 어떻게 한국 노래가 나오는지 신기했는데 이후 친구의 말에 따르면 연출가 선생님이 예전부터 좋아하던 노래라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서커스 공연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발라드 노래에 주연 배우 셋이 하늘거리는 춤을 출 때에는 트롯 가수의 애절한 노래에 맞추어 춤추는 백댄서의 모습이 겹치기도 하고, 젠느들이 일렬로 늘어서 다리를 위로 팡팡 차올리는 댄스를 보여줄 때에는 유치원생 시절 학예회에서 비슷하게 진한 화장을 하고 캉캉댄스를 추던 옛날 기억까지 갑자기 소환되었다.
맑게 바르게 아름답게, 다카라즈카만의 독특한 세계관
공연을 보고 유라쿠초 역으로 걸어가 야마노테선 전철을 기다리자니, 플랫폼에서 바라본 풍경이 방금 전까지 눈 앞에 펼쳐지던 형형색색 알록달록한 무대와 대조되며 현실이 음소거된 무채색 장면처럼 비쳤다. 이 무슨 위화감이람. 다카라즈카를 좋아하는 이유로 ‘반짝반짝 빛나는 소녀들의 아름다움이 청춘을 떠올리게 한다’ ‘항상 웃는 얼굴로 완벽한 공연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젠느들의 모습을 응원하게 된다’는 글을 보니, 다카라즈카는 마음만은 하고 싶은 어른들에게 현실을 잊게 하는 환상의 세계 같은 걸까 생각했다.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정신 ‘맑게 바르게 아름답게’에 맞추어 극단과 팬들이 함께 지키는 ‘스미레 코드’로 불리는 암묵적인 행동 강령이 흥미롭다. 예를 들면, 젠느들의 본명과 나이, 사생활을 일절 공개하지 않고 팬들도 이런 정보를 찾거나 인터넷에 올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젠느들은 모두 예명으로 활동하는 것이라고. 외부에서 젠느들을 우연히 마주치게 되더라도 아는 척하지 않고 지나쳐야 한다는데, 젠느의 사생활 보호 차원보다는 젠느의 아이덴티티를 현실 세계에서 분리하기 위한 목적이 더 강해 보인다.
다카라즈카 극단 설립자가 고상한 국민 오락으로서의 다카라즈카를 지향했기에, 오리지널 작품을 각본으로 활용할 때에도 외설적인 장면은 가차 없이 검열해 삭제했다고 한다. 남자 역할을 여자가 맡아 연기하는 점 역시 ‘남성성’과 ‘여성성’을 다 제거해 순수한 오락성만 남기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 아닐까. 결혼을 하면 더 이상 젠느로 활동할 수 없다는 원칙 역시 맑고, 바르고, 아름다운 소녀성을 바탕으로 구축된 다카라즈카의 세계관을 생각해보면 납득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카라즈카의 ‘만들어진 소녀의 이미지’가 천황 중심주의와 가부장제라는 일본의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토대가 되었다고 비판하는 시각도 있었다(배묘정 저, 『정치의 가극화, 가극의 정치화』). 개인이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이렇게 국가나 사회가 주입한 결과로 해석하고 개인을 자기 결정권을 폄훼하는 접근에는 강한 거부감을 느끼지만 실제로 다카라즈카 가극은 국가의 주요 행사에 자주 동원되어 일본이라는 국가의 이미지를 대변하기도 한다. 이번 도쿄 올림픽 폐막식에서 일본 국가를 제창한 이들은 다카라즈카 톱스타 3인이었다.
다카라즈카 가극단과 음악학교의 규율이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건 사실이지만, 이런 완벽에 가까운 판타지의 세계관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피, 땀, 눈물이 필요한 걸까. BTS, 블랙핑크 같은 세계적인 아이돌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국 특유의 연습생 제도가 자리 잡은 것처럼.
공연이 끝나자 혼잡을 피하기 위해 앉은 열에 따라 순차적으로 퇴실하라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는데 우리가 앉은 자리는 하필 가장 마지막으로 안내를 받았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정말 한 명도 꿈쩍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데, 퇴실 안내 방송을 듣고 그제서야 조용히 자리를 뜨던 내 옆자리의 아주머니들, 앞줄의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 샤넬 백을 메고 온 젊은 여성 관객은 각각 어떤 감상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을까.
공연의 실제 느낌이 궁금하신 분을 위한 맛보기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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