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슈발리에 Le Chevalier D’Eon (2006)
슈발리에(Le Chevalier D’eon)는 Heroic Age, PSYCHOPASS, 창궁의 파프너 등의 각본을 맡은 우부카타 토우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 중인 유메지 키리코가 합심하여 연재했던 동명의 만화를 영상화한 Production I.G.의 2006년 작품이다.
제목은 프랑스어로 ‘기사 데옹’이라는 뜻이다. 애니메이션, 만화 모두 짧게 <슈발리에>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국내에서도 애니메이션 채널인 애니맥스롤 통해서 2007년에 방영이 된 작품이다. 장르는 대체역사물.
1728년에 태어나 1810년에 사망한 프랑스의 실존 인물 데옹 드 보몽(Charles-Geneviève-Louis-Auguste-André-Timothée d’Éon de Beaumont)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루이 15세 시대가 배경인데, 프랑스와 영국, 러시아 간의 외교 분쟁과 프랑스 혁명까지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데옹 드 보몽은 프랑스 부르봉 왕조 루이 15세의 기사이자 스파이로 활동한 외교관이다. 인생의 반을 남자로, 인생의 반을 여자로 산 특이한 인물이기도 하다. 1758년부터 1760년까지 그는 ‘리아 드 보몽’이라는 가명으로 러시아 제국에서 프랑스 대사관의 차관 겸 예카테리나 1세의 딸이자 러시아의 여왕이었던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시녀로 활동했다. 스파이로서 그의 임무는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를 설득하여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에 함께 대항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는 멋지게 임무를 성공했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1761년에는 기병대장으로 승진하였으며, 7년 전쟁에도 참전하였다. 이후에는 영국에서 임시 대사로 활동하면서 첩보활동을 계속했다.
이후 프랑스에서 새로운 대사가 파견되면서 다시 차관으로 강등당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그가 비밀 외교문서 일부를 책으로 출간, 공개하면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데옹 드 보몽은 당대 최고의 외교관 중 한 명으로 기밀문서의 상당수를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는 그에 대한 대응을 보다 신중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정부는 그가 요구한 지위를 유지하여 주었으나, 이를 계기로 루이 15세와는 완전히 사이가 틀어져 프랑스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는 1774년 루이 15세의 서거 이후 프랑스로 돌아온다. 새로 즉위한 루이 16세에게 루이 15세의 기밀국에서 활동하던 당시의 비밀 서신들과 비밀 문서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귀국하게 된다. 귀국 이후 그는 ‘여자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낳아야만 장인에게서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남자아이로 키워졌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남자의 신분으로 국가에 봉사하였으니 ‘연금을 받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며 루이 16세에게 탄원을 한다. 이에 루이 16세와 신하들은 ‘진짜 여자라면 여자 옷을 입고 어전에 출두하라’고 요구하였는데, 진짜 드레스를 입고 출두하였다고 한다.
데옹 드 보몽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785년에 영국으로 돌아간다. 이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면서 연금이 모두 끊기고 궁핍한 생활이 시작된다. 프랑스와는 완전히 단절된 채 천문학적인 부채에 시달리며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말년을 영국에서 보냈기 때문일까, 그를 묘사한 초상화나 작품들의 상당수는 대영제국 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서 자신이 진짜로 여성이라 믿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의 외모도 여성스러운 편이었다. 그래서 사교계에서는 그의 성별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종종 화두로 떠오르곤 했다고 한다.
사후에 이루어진 부검 결과 그는 남성으로 판명되었다. 그의 자서전이나 그를 다룬 소설들, 당시의 기록 등을 종합해 보면 그는 이차성징이 나타나지 않고 생식기의 발육이 거의 나타나지 않은 칼만 증후군이나 생식기능 저하증 환자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데옹 드 보몽이지만, 이 <슈발리에>속 이야기는 실제 역사와 다르게 전개된다. 데옹 드 보몽에게는 사실 의문의 죽음을 맞은 ‘리아 드 보몽’이라는 누나가 있으며, 그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부르봉 왕조의 운명을 예언한 ‘왕가의 시’라는 책이 등장한다. 이 책을 노리는 왕가와 혁명세력, 성경의 시편으로 미스테리한 힘을 부리는 시인들, 여기에 프랑스와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얽히며 영국의 왕족들과 귀족들 이야기까지 가세하여 거대한 역사의 드라마를 그리고 있다.
만화의 경우에는 조금 더 판타지다운 설정이 가미되어 있으나, 애니메이션의 경우 역사적 배경이나 실존인물들의 이미지를 최대한 왜곡하지 않는 방향으로 제작되었다. 스토리 자체는 판타지적인 요소와 미스테리를 가미한 추리극이나, 실제 역사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실제 역사에서 데오 드 보몽은 여장을 하고 활동하였으나, 만화와 애니메이션에는 누나의 영혼이 ‘빙의’하면서 여자처럼 변모하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Production I.G.의 전성기 시절 나온 작품답게 작화, 연출, OST, 시대 고증 등 모든 면에서 상당히 빼어난 작품이다. 특히 프랑스 혁명을 암시하는 듯한 연출이 가미된 오프닝 애니메이션과 실존 인물들의 생몰년을 보여주는 엔딩 애니메이션이 압권이다. 역사물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한다.
이 애니메이션은 프랑스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구가했다. 프랑스의 애니메이션 관련 코스프레 이벤트에 참가하는 상당수의 코스튬 플레이어들이 재현하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2. 효우게모노 へうげもの (2011)
<효우게모노(へうげもの)>는<데카슬론>, <극한의 별>, <자이안트> 등 스포츠 만화를 주로 그린 야마다 요시히로가 2005년부터 연재 중인 역사만화이다.
참고로 <효우게모노>는 ‘괴짜’ 라는 뜻인데, 작가가 일부러 전국시대의 히라가나 표기를 사용했고 애니메이션도 이를 그대로 차용했다. 애니메이션은 <황금전사 골드라이탄>, <도미니온>, <무책임함장 테일러 시리즈>, <Hack> 시리즈, <Noir> 등으로 유명한 베테랑 감독 마시모 코우이치에 의해 2011년에 제작되어 NHK에서 방영이 이루어졌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다룬 만화 및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 중에서도 <효우게모노>는 화려한 전국무장들의 활약상이나 역사적으로 유명한 전투 등을 다루지 않는다. 당시 전국무장들과 공가(公家. 쿠게라고 읽는다. 일본의 조정대신들을 일컫는 말)에서 유행한 다도를 중심으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여러 미술작품이나 예술적 명품들, 그리고 이를 둘러싼 인물들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조금 더 간단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풍류라는 미명 하에 온갖 럭셔리 아이템에 목숨을 거는 ‘전국시대의 덕후’들에 관한 이야기다. 역사, 특히 문화재에 대한 역사가 중심이지만 <효우게모노>는 내용 자체가 상당히 가볍고 아스트랄한 연출이 특징인 작품이다. 대중적인 미디어를 패러디한 요소들이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전국시대를 다룬 타 작품들보다 역사 속 인물들을 상당히 파격적으로 재해석하는 코미컬한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오다 노부나가의 패션 감각은 가히 안드로메다 그 자체이다)
기본적으로 코미디 작품이지만 소품이나 배경 상의 고증은 NHK 대하 드라마 못지않은 섬세함이 살아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등장인물들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주관이 많이 들어갔으나, 작가의 허황한 공상이 아니라 실제 인물의 성격이라 생각될 정도로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연출이 뛰어난 편이다.
또한 일본 사학계에서 오랫동안 언급되어 온, 아케치 미츠히데의 ‘오다 노부나가 암살 사건’ 관련 추측(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깊게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음모론)에 대해서도 작가가 상상력을 풍부하게 발휘하여 재해석하면서 단순히 코미디 작품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수작으로 발돋움한다.
시대 배경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일본 전국시대이다. 주인공은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두 주군으로 섬긴 야마시로 니시가오카 번의 초대 번주, ‘후루타 오리베’이다. 후루타 오리베는 일본 전국시대 최고의 ‘도자기 오타쿠’인데, 이 사람의 소장 아이템들이나 취향이 워낙 독특해서 오늘날에도 많이 회자되는 인물이다. 또 일본에서 다도를 정립한 센리큐의 실질적인 후계자이기도 한 인물이다.
이 사람의 컬렉션이 하도 대단해서, 일본의 다도 관련 단체나 도자기 관련 단체들에서는 종종 이 사람의 컬렉션을 전시하는 이벤트를 개최한다. 당대 일본 무장들과 공가의 귀족들, 그리고 왕가의 인물들이 수수한 멋을 지닌 조선의 도자기를 선호한 데 비해 후루타 오리베는 명나라의 화려한 도자기들도 선호하였다.
<효우게모노>는 애니메이션을 먼저 감상한 후에 만화를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한다. 만화책은 단행본 발매 속도가 상당히 느리긴 하지만 국내에도 정식으로 발매되어 있으니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일본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만화인 만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대한 묘사도 등장한다. 단, 주제 자체가 ‘득템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덕후들’이다 보니 간접적으로 약간의 묘사만 등장하는 수준. 또한 주인공 후루타 오리베는 임진/정유의 양난에 참전하지 않은 인물이다 보니 작가가 굳이 깊게 묘사하지 않은 듯하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여담으로, 작가가 만화를 그리면서 상당히 많은 사서를 참고했다고 한다. 특히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서해 류성룡의 <징비록>을 많이 참고했다. 만화에 한정된 이야기지만 충무공 이순신이 진짜 멋지게 나오는 몇 안되는 일본 작품이기도 하다.
3. 바람의 검심 – 추억편 るろうに剣心 -明治剣客浪漫譚-追憶編. (1999)
와츠키 노부히로가 1994년부터 1999년까지 연재한 <바람의 검심> 시리즈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OVA 작품. 총 4편으로, 1999년에 제작, 발매되었다. 역대 시리즈 중에서 가장 멋진 작품임과 동시에, <바람의 검심>을 상징하는 작품이 되어버린 레전드 급 애니메이션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원작 만화의 경우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소년만화이다. 에도 막부 말기, 유신지사들과 함께 활동한 히무라 켄신이라는 검객이 평화가 도래한 메이지 시대를 살아가며 악에 맞서 싸운다는 전형적인 액션 만화이다.
원작만화는 단행본만 총 7천만 부가 판매될 정도로 큰 인기를 구가하였고, 그래서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와 극장판 애니메이션, OVA로 제작되었다. 최근에는 뮤지컬, 연극, 그리고 실사판 영화까지 시리즈로도 제작되었다. 실제 역사가 배경이고 실존 인물들이 상당히 많이 등장하나, 기본적인 장르가 무협지다운 액션 만화와 러브코미디를 가미한 작품인 관계로 실제 역사와는 거의 무관한 판타지 요소가 많이 차용되었다.
작가가 만화를 연재한 매체 또한 어린 나이의 학생들을 주 타겟으로 삼고 있는 주간 만화잡지였다. 그래서 마블코믹스나 무협지스러운 과장된 액션이 주를 이룬 반면, 잔인한 묘사는 될 수 있는 대로 지양하였다. 이는 TV 애니메이션으로 이식될 때오도 마찬가지였고 1997년에 상영된 극장판 애니메이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바람의 검심 시리즈 중 유독 이 <추억편>만이 한 편의 사극을 보는 듯한 진지한 연출을 보여준다. 기존의 시리즈에 흐르던 코믹한 요소는 모두 배제되었다.
원작 만화와 달리 등장인물들은 모두 진지한 성격으로 묘사된다. 등장인물들의 대사에도 시대 배경을 고증하기 위한 노력이 상당히 가미되어 있다. 당시 시대상을 묘사하기 위한 연출도 뛰어나다. 원작만화가 가진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2차원적 구조를 벗어나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군중들의 충돌과 숙명이라는 주제까지 더했다.
액션 연출에 있어서도, 일본 소년 액션 만화 특유의 과장된 연출(외우기도 힘들 정도로 긴 기술명을 마구 외쳐대며 비상하거나 순간 이동을 하는 등의 액션)이 모두 배제되었다. 대신 검술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잔인하면서도 화려한, 지극히 영화적인 연출이 가미되었다. 특히 1화 초반의 검투씬과이케다야에서 신센구미와 유신지사들의 전투 장면은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상 길이 남을 검투씬 중 하나로 꼽힌다.
주인공 ‘히무라 켄신’의 연기를 담당한 성우는 TV애니메이션, 극장판에 이어 스즈카제 마요가 담당하였다. 스즈카제 마요는 1960년 생의 다카라즈카 가극단 배우 출신의 성우이다. 애니메이션 성우로 기용되기 전에는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톱스타 중 한 명이었는데, 특히 역대 최고의 ‘오스칼(베르사이유의 장미)’ 역으로 꼽히는 배우이기도 하다.
그녀의 성우로서의 능력은 <바람의 검심> TV 애니메이션에 주인공 역할로 발탁되면서 십분 발휘되었다. 특히 <추억편>에서 그녀가 장기로 삼는 ‘남자 연기’가 가히 최고조에 달했다는 평이다. 영상을 보지 않고 음성만 들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멋있다.
국내에서는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 애니원에서 2004년에 방영된 바 있으며, DVD도 출시되었다. DVD에는 본편 4편과 함께 감독판 1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되도록 감독판보다는 본편을 보시는 쪽을 추천해 드린다. 말만 감독판이지 4편을 짜깁기한 것에 불과하다.
여담으로, 사실 이 작품은 1997년 상영된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흥행에 성공했더라면 제작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작품이다. TV애니메이션이 큰 성공을 거둔 후 여세를 몰아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는데, 이게 <바람의 검심> 시리즈 중에서도 흑역사로 꼽힐 정도로 퀄리티가 낮은 작품이 되었다. 작화 붕괴는 물론이요, 기본적인 스토리조차 ‘쓰레기’라는 소리를 들으며 흥행에 참패했다. 이로 인한 피해를 막아보고자 제작한 게 이 <추억편>이다. 결과적으로 역대 시리즈 중 가장 멋진 작품이 되었다. 이후 만화의 후편을 다룬 <성상편>도 OVA로 출시되었는데 <추억편>만큼의 인기는 끌지 못했다.
출처: 성년월드 흑과장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