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은 다른 어느 사람을 미워하기 위해, 그 사람을 프레임화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는 악마적이거나 모순적이고 기만적인 인간이다. 그는 어떤 종류의 사람인데, 그런 종류의 사람은 잘못되었거나 나쁜 부류이다. 그는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다양하고 복잡한 내면을 갖고 있고, 그래서 여러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만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단 한 종류로 정의할 수 있는 타입의 인간이므로, 미워해도 된다.
타인을 프레임화한다는 것은 그를 이해하지 않겠다는 뜻과 같다. 이해하기보다는 분류하고, 이해하는 대신 규정하고, 이해하고자 애쓰기보다는 이해를 그만둔 채 과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한 인간을 유동적이고 다채로우며 복합적인 존재로 정의하는 대신, 단순하고 단면적이며 하나의 속성밖에 없는 존재로 확고하게 정의 내리는 순간, 그는 이제 내게 폭력을 입어도 괜찮은 존재가 된다. 비난, 조롱, 경멸, 혐오, 배제 같은 것을 안심하고 해도 좋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한 인간을 이해하고자 마음먹는다면, 사실 평생에 걸쳐서도 그를 어느 ‘하나의 타입’으로 규정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끝이 없는 일이고, 앎의 한계와 이성의 폭력성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나아가 이해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이며, 완전히 미워할 수 없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 누군가를 폭력적으로 규정한 바로 다음 순간, 그런 규정이 결코 그를 100% 설명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그 규정을 스스로 버리고 수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실, 누군가를 프레임화해서 미워하는 건 미워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에게 이해심이나 이해력 같은 걸 발휘하고 싶지 않다는 선언이다. 가령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나의 이해심이라는 것도 한정되어 있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에는 에너지가 들고, 나의 에너지는 무한하지 않다. 그러므로 어떤 이유에선가 그를 이해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선언한다. 나는 그에게 이해심을 발휘하지 않겠다, 그를 이해하는 걸 포기하겠다, 따라서 그에게는 무관심이나 미움을 가지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용서할 수 없을 만큼 큰 죄를 저질렀다고 믿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단지 그를 배제해야만 내가 편안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저 관심을 갖고 싶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에너지가 덜 들고 손쉬운 ‘프레임화’를 택하거나 아예 완전한 ‘무관심’을 선택한다. 그러나 이때 무관심이 아니라 ‘프레임화’를 택하면 그것 자체로 폭력을 택하는 길이기도 하다.
때로는 그것이 정의로운 폭력일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그저 폭력일 뿐인 폭력일 수도 있다. 대개는 그냥 폭력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것도 타인들에 대한 폭넓은 이해심보다는, 손쉬운 프레임화이고 폭력이라는 건 꽤나 자명해 보인다.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프레임화’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한 사회에 대해서든, 한 인간이나 삶에 대해서든, 그 속에 가득한 것이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한 손쉬운 프레임화뿐이라면, 그 사회 또는 삶은 꽤나 척박한 상황이 아닐까 싶다. 그 사회 또는 삶 속에는 그만큼의 이해심이,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에너지가, 그를 통해 관대해지고 겸허해지는 마음이랄 것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것일 테니 말이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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