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리 사회는 ‘나르시시스트’에 대한 집단적 트라우마를 앓는 사회일지도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나르시시스트 가부장’에 의한 트라우마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 원형은 아버지이겠지만, 직장 상사, 지도교수, 학교 선배 등 일군의 나르시시스트로부터 착취당한 경험이 전 사회 구성원들의 밑바탕에 깔린 근원적 경험이 아닐까 싶다. 최근 청년 세대의 여러 경향도 이런 측면에서 보면 꽤 명확해지는 지점이 있다.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는 핵심적인 이유 중 하나는 ‘엄마처럼 살기 싫다’이다. 사회적인 위신, 인맥, 성공을 위해 한평생 살아온 자기중심적인 아버지와 희생당한 어머니의 그림은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사실상 청년 여성에게는 ‘앞선 세대’의 롤모델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엄마처럼, 할머니처럼, 다른 기성세대의 여성처럼 살지 않겠다’ ‘나의 자존을 지키고 스스로 인정받으면서 경력을 잃지 않고 나를 존중하고 지키는 삶을 살겠다’ 그것이 보편적으로 깔려 있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강압적이거나 폭력적이며, 자기중심적인 가부장의 이미지라는 것은 그 밖의 방식으로도 폭넓게 경험된다. 남성의 경우에는 거의 군대에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되는데, “중대장은 실망했다”에서 ‘중대장’은 바로 그 가부장을 지시하기도 한다. 아무리 잘하더라도 만족하지 않는 아버지, 결국 호통치고 억압하는 아버지, 끊임없이 자기만족을 갈구하며 자식에게 기대치를 높이며 가스라이팅 하는 가부장이 ‘중대장’이다.
이런 중대장은 이후 청년들이 편의점 사장, 직장 상사, 지도교수 같은 형태로 계속 경험하게 된다. 그 공통적인 근원은 아마도 ‘군부 독재자’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전 사회적으로, 공무원 조직, 회사, 학교 등을 총체적으로 ‘군대 문화’로 만들고, 복종, 폭력, 강압, 끝없는 요구, 절대적인 하대 같은 것들을 일상화시킨 사회적 구조가 곧 가정에도 스며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사회는 이 트라우마가 쌓이고 쌓이다가, 썩어서 가스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사회라는 느낌이 든다. 갑질, 비혼, 저출생, 각자도생, 혐오와 차별, 집단 갈등… 이 근저에는 괴물 같은 아버지가 깔려 있다. 이 만족을 모르는 ‘아버지’가 사람들의 정신 밑바탕에 깔려 있다면, 이것은 사회적 신뢰나 서로 간의 연대 의식을 갉아먹는 ‘구멍’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볼 때도 그들이 자기중심적인 나르시시스트라고 보는 데 길들어 있다. 기본적으로 타인들을 신뢰하기보다는 적대하거나 경계하는 게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태도인 것이다. 그 이유는 내 안에 있는 바로 그 ‘나르시시스트 아버지’가 타인들 속에도 담겨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저마다 만족을 모르는 그 괴물 아버지를 ‘자기 안’에 지녔기에, 언제든지 ‘저 바깥의’ 타인들을 후순위로 만들 수 있다. 타인들에게 나도 그럴 수 있다.
그렇기에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일이란 우리 사회의 집단적 치유 과정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타인을 신뢰하고, 다정함의 용기를 낼 줄 알고, 자기 만족과는 다른 가치를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폭력성을 이해하는 일은 곧 자기 치유 과정이자 이 사회의 치유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게 조금은 덜 계산적이 되고, 조금은 덜 탐욕적이 되어가는 과정은 곧 삶을 회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실 이 사회에는 집단 치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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