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인정 욕망이라고 했을 때 인정받는 욕망을 떠올리지만, 사실 인정을 ‘수여’하는 욕망이야말로 궁극의 인정 욕망이다. 타인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을 때 우리는 자신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안도감, 내 존재가 상승했다는 성취감, 내가 속할 세계가 생겼다는 소속감 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느낀다. 그러한 감정은 ‘쾌감’으로 요약되는데 사실 쾌감은 인정을 받을 때보다 줄 때 더 크게 느낄 수 있다.
요즘도 성행하는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그 시간을 가장 즐기는 사람은 누구일까? 전전긍긍하며, 불안해하고, 자기 존재에 대한 수치심과 박탈감을 감수하면서 인정받고자 하는 참가자? 그들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았을 때 오는 격렬한 쾌감? 사실 그것은 과장된 감정에 가깝다.
오히려 가장 안정적이고도 진정한 쾌락은 그들에게 호통치고, 그들을 선별하며, 그들에게 인정을 하사하는 심사위원 혹은 코치들에게 있다. 물론 투표로 그러한 ‘인정 수여’에 참가하는 시청자들도 있겠지만, 이조차 자신이 선택한 후보가 선택되었을 때의 승리감에 자기를 투사하는 감정에 가까울 것이다. 심사위원들이야말로 거의 ‘절대적인’ 위치, 신에 가까운 위치에서 자기 앞에 선 수많은 참가자를 바라보며 그들을 평가하고 골라낸다.
그들은 자기가 던지는 눈빛, 자기의 손짓, 자기의 웃음 하나에 투여된 힘을 느낀다. 자신은 더 이상 결코 평가받을 필요 없는 위치에서, 타인들을 인정해줄 수 있는 위치에서 절대권을 행사한다. 이는 그들이 흔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아득히 초월해버린 자리에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 자리는 천상처럼 안전하고, 불안할 것이 없으며, 절대적이고, 관조적이며, 의기양양한 쾌감을 주는 그런 곳이다.
이런 방식의 ‘인정 수여’는 특히 어느 정도 권력을 획득한 기성세대가 자주 쾌감을 느끼기 위해 활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들은 자신의 원로, 지배자, 리더, 결정자와 같은 자리에서 누군가를 지지해주거나 선택해주고 그들을 ‘밀어주고 당겨주면서’, 즉 궁극적으로 ‘인정을 하사’하면서 쾌감을 지속한다.
더 이상 타인들의 인정에 절박하게 매달릴 필요가 없는 자리에서, 타인들로부터 호명 받을 필요가 없는 위치에서, 자기의 힘과 권위로 타인들을 지목하며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쾌감과 희열이 그 자체로 완전히 ‘나쁜’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인정하고자 하는 욕망이 악마의 욕망이 아니듯 인정을 수여하고자 하는 것도 악마의 욕망은 아니다.
단지 그 과정에서는 참으로 중요한 가치들이 누락될 여지가 크다. 이를테면 인정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문제가 되듯이 인정을 수여할 때도 그가 품은 지배욕, 쾌감(자신의 위치)을 지속시킬 가능성, 권력 유지 욕망 같은 것들이 착종되면 인정 수여 과정이 ‘자기 식구’ 만들고 챙기는 ‘집단 이기주의’ 등으로 얼마든지 귀착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종합한 것이 이른바 ‘가부장적 수직 구조‘다. 인정을 수여하는 가부장들이 온갖 영역에서 수직적으로 높은 위치에서, 아래로 인정을 하사한다. 그렇게 학계, 문단, 법조계, 군대, 정치계, 언론계, 예술계, 연예계 등을 가릴 것 없이 ‘인정’을 매개로 ‘가족들(선후배들)’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한 가족들의 핵심에는 바로 인정을 통해 발생하는 ‘쾌감과 희열’의 지속과 계승, 상속이 있다.
그렇기에 인정받고 인정하는 걸 평생 멈추는 것이야 불가능할 테지만 누군가 나를 인정한다고 할 때, 혹은 내가 누군가를 인정한다고 할 때, 과연 그 ‘인정’이 무엇인지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연 그 인정은 ‘그에게의 구속’ 혹은 ‘나에게의 구속’을 의미하는가? 그런 인정이라면 경계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구속되어야 할 것은 인정해주는 ‘누군가’가 아니다. 또한 ‘누군가’에게 인정을 줌으로써 그를 곁에 두는 일도 아니다. 우리가 구속되어야 할 것은 그 인정이 담보하는 ‘가치’다. 그 인정은 무슨 ‘가치’에 기반을 두는가? 그 가치는 정말 좋은 가치인가? 평생 지켜낼 만한 가치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를 따져야 하는 것이다. 얻어야 할 것은 ‘가치를 품은 인정’이다.
원문: 정지우 문화평론가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