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일루즈의 책 『해피크라시』에는 꽤 흥미로운 통찰이 나온다. 현대사회의 행복 산업을 비판하면서, 행복이 인생의 목표라기보다는 ‘전제’가 되었다는 지적이다. 성공해서 행복을 얻는다는 생각은 이제 옛것이 되었다. 오히려 행복해야 성공할 수 있다. 행복한 사람, 낙관적이고 밝고 회복 탄력성이 높은 사람이어야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거대한 자기계발 산업이 되었다고 본다.
현대의 자기계발주의자들은 다소 우울하거나, 내성적이거나, 그리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학업 성취도도 낮고, 성공적인 취업을 하기도 어려우며, 직장에 들어가서도 조직에 잘 적응하지도 못해 ‘성공’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우울에 머무르는 사람은 현대사회에 어울리지 않으며, 우울하지 않더라도 ‘적극적으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서둘러 스스로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한 인간이 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망치질 하지 않으면, 그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는 불가능하리라는 것이다.
사실 모든 사회에는 그 사회마다의 주된 ‘강박’이 있다. 어느 시대는 유달리 사랑이나 결혼이 강조되고, 어느 시대는 꿈이 없는 인간이란 죽은 인간이라 말하기도 한다. 어느 시대에는 신과 영성이 강조되며, 어느 시대에는 공산주의나 대의와 정의가 중요한 강박이다. 현재 미국을 중심으로 한 현대 사회는 ‘행복’이라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물론 행복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다. 아마도 행복이 그처럼 거대한 산업이자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행복이 그만큼 삶에서 의미 있는 측면이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문제는 언제나 한 시대의 주된 이데올로기가 강박이 되고, 산업이 되면서, 강요가 되는 것이다.
아마 ‘행복한 상태’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어쩌면 정말로 의욕이 높고, 남들과 관계가 좋고, 그래서 사회에서 적응하는 데 유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인생 내내 ‘행복 가득한 활기’를 가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런 강박은 수많은 사람에게는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럽고, 그래서 삶을 뒤틀린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다.
너무 행복과 활력과 무한한 회복탄력성과 긍정으로 가득한 상태보다는 적당한 염세주의 속에서의 평화, 고요한 편안함, 가라앉은 내면적인 삶이 더 어울리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혹은 다소 고통스럽더라도 행복보다는 고통을 택하면서 치열하게 의미를 좇는 삶이 더 맞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행복의 강박이란, 대개 소비사회의 화려한 소비에 대한 욕망과도 맞물린다. 어느 SNS나 TV 속에서 화려한 소비를 하며, 웃고, 즐기며, 수많은 사람들과 행복 터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 같은 어느 삶을 향한 강박, 말하자면 ‘상향 평준화된 이미지’에 대한 강박 또한 일종의 행복에 대한 강박이다. 반대로 덜 이미지적이고, 덜 화려하고, 덜 시끄러운 삶에 대한 매혹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때 귀농이나 한적한 숲속에서 고요한 삶을 찾는 트렌드가 잠시 있기도 했으나 어느덧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더 중심으로, 더 수도권으로, 더 화려한 곳으로, 더 상승할 것! 행복으로 향하기 위해 행복한 인간이 될 것! 행복이 전제이자 결과인 삶을 살 것! 행복을 전시하고 고통은 없는 것처럼 살 것! 그것이 우리 사회의 명령이다.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서 사람은 그 시대의 강박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내면화하게 된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 내게도 당연히 행복에 대한 강박이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대의 요구를 따르는 것 또한 나쁘다기보다는, 인간의 운명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모든 사람에게 좋은 단 하나의 기준 같은 건 세상에 없다. 어떤 시대의 어떤 기준은 많은 사람에게 유의미할 수는 있어도, 모든 사람에게 그럴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내게는 내게 어울리는 삶을 알아가는 것이, 시대의 강박을 따르는 것보다 언제나 더 중요하다. 때로는 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시대와 치열하게 싸울 필요도 있는 것이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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