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감상과 관련해 미술교육학계에서 흥미로운 논쟁이 있었다. 1960년대 말 미국의 미술교육학자 존 데브스(John Debes)가 처음 ‘비주얼 리터러시(Visual Literacy)’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시각 이미지는 반드시 해석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텍스트상의 지식으로 다루자”고 주장했다.
연필과 붓으로 직접 잘 그려낼 줄 아는 것보다는, 그림이나 이미지를 읽고 해석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비평주의 미술교육론’이 대두되었다. 이는 마치 그림은 배워야 이해할 수 있는 외국어와 같다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이야기가 당연히 강조되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바로 반론에 부딪히게 된다. 미술은 한 개인의 감정과 정서의 표현이라는 ‘표현주의 예술교육론’을 주장하는 학자들과 갈등하며 논란이 되었다. 그림은 공부해야만 하는 외국어가 아니며, 예술가의 천재성이나 창의력은 지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도 설득력이 있다. “몰라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미술교육에서는 실기와 해석이라는 두 가지 능력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2000년대 이후로 접어들면서 비주얼 리터러시는 점차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라는 포괄적인 의미 속에 들어가게 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 vs. 몰라도 느낀다
이것은 미술교육을 공부하고 실천했던 나에게 가장 큰 화두이자, 어쩌면 살아가는 에너지가 되는 두 개의 명제다. 그림을 맛있게, 영양이 되게 섭취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 가장 첫 번째가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다. 이미지를 추리하며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디어 리터러시 감도가 빠른 사람일수록 자동적으로 실행되는 첫 번째 과정이다. 마치 탐정가의 시선으로 그림을 뜯어보는 것부터 시작하게 된다.
아래 작품은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중 한 명인 존 콜리어(John Collier)의 〈레이디 고다이바(Lady Godiva)〉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여기 이 여인의 모습이 벨기에의 유명 초콜릿 ‘고다이바’의 아이콘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있겠다. 이 작품의 경우 레이디 고다이바를 알거나, 라파엘 전파와 존 콜리어를 알면 그림을 바라보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런데 다시 아래 작품을 보면, 여기에도 비슷하게 ‘소를 탄 여인’이 있다. 김홍도의 〈노상파안(路上破顔)〉이다.
흔히 미술 작품이라 하면 색채 찬란한 유화나 수채화 같은 서양화만 떠올리곤 한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과거 우리나라 미술교육이 서양미술 편향이었던 탓이 크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미술에서부터 시작해 현대 추상화까지 이어지는 서양미술사의 대강은 알면서도, 정작 한국미술과는 친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 선조가 남겨놓은 그림 중에는 들여다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작품들이 정말 많다. 그중 하나로 김홍도의 〈노상파안〉을 꼽겠다.
〈노상파안〉은 김홍도의 유명한 풍속 화첩 중 하나다. 밑도 끝도 없이 “길 위에서 미소 짓다”는 제목만이 이 그림에 대한 정보의 전부다. 왼쪽의 말을 탄 여인 고다이바처럼 디테일한 배경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구현했다는 깊은 사상적 주장도 없이, 그저 어떤 과거 조선의 한 풍경일 뿐 구체적으로 전해지는 지식이 없는 작품이다. 그러나 오히려, 정해진 이야기가 없기에 우리는 마음껏 상상해 볼 수 있다.
어린아이를 안고 소를 탄 아낙네, 그 뒤를 쫓는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와 큰 갓을 쓴 양반네 일행과 길에서 마주친 장면이다. 등장인물은 총 6명, 등장 동물은 소, 말, 망아지, 닭, 총 4마리 되겠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묘한 것이 세 어른의 시선이다. 부채로 얼굴을 살짝 가린 큰 갓 쓴 양반은 누구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지 분명하지 않다. 머리 쓰개를 살짝 들어 올리는 여인과 눈이 마주친 것인지, 아이와 닭과 짐까지 등에 업고 땀 흘리며 걸어가는 (아마도) 남편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양반네가 큰 말이 아닌 작은 조랑말을 타고 가는 탓에 어딘가 품새도 한량스러운 기운이 있다. 조랑말을 몰고 가는 소년 몸집의 몸종은 앞으로만 시선을 둘뿐 지나가는 행인 가족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조랑말이 3월에 새끼를 낳아 5–6월까지 젖을 물린다고 볼 때 이 장면은 한창 싱그러운 녹음이 시작되는 깊은 봄, 흔히 젊은 여인의 마음이 깨나 뒤숭숭해진다는 계절인 봄이다. 젖먹이를 안은 젊은 여인의 미소는 어쩌면 걸어가는 와중에도 굳이 젖을 먹겠다는 양반네의 어린 망아지에게 향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김홍도의 〈노상파안〉은 조선 시대의 한가로운 봄날,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따뜻한 마을 어귀 풍경의 ‘스틸컷(still cut)’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불량한 상상을 조금 해 볼까? 부채로 얼굴을 가린 양반네의 응큼한 미소와 서방 몰래 눈빛을 주고받는 봄바람 난 여인네의 남녀상열지사 한 장면일 수도 있지 않은가. 마치 스냅사진 한 장처럼 순간의 상황만 남겨진 이 그림에서 작가 김홍도는 묘한 미소를 던져준다.
김홍도의 〈노상파안〉은 예술과 역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상식이 있다면 좋겠지만, 전혀 아는 것이 없어도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그림이다. 어떤 의미에서 좋은 그림이란 무릇, 배경지식을 알아도 즐겁고 몰라도 상관없이 즐거운 감상으로 마주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어떤 이에게는 두 그림 모두 ‘애마부인’에서 감상이 끝나지만, 어떤 이는 걸출한 영화나 드라마 시놉시스를 떠올릴 수도 있다.
그림 속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과정이고, 이를 통해 감동하는 것은 행복한 감상이 된다. 한 장의 그림을 통한 짧은 상상만으로도 한 편의 드라마, 소설, 영화가 가능해진다. 그림뿐 아니라 각종 미디어 매체에서 쏟아지는 광고 이미지, 매일 쓰는 제품에 새겨진 작은 이미지도 그저 쳐다보는 것을 넘어, 그 뒤편의 무언가를 상상하는 훈련을 한다면 21세기의 화두, ‘크리에이티비티(creativity)’는 좀 더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원문: 송주영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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