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는 비극적인 예술가의 대명사다. 현재는 세계에서 제일 인기 많은 화가이지만, 정작 본인은 그 영광을 누리기도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는 생전에 단 한 장의 그림을 팔았다. 그래서 살아서는 대중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천재의 대표격으로 불린다.
하지만 여기에 작은 반전이 있다. 그가 살아생전 그림을 한 장밖에 팔지 못한 건 미술상이자 그가 대성할 것임을 일찌감치 예감했던 그의 동생 테오가 고흐의 그림 판매를 독점하고 있었던 영향이 크다(…) 만약 테오뿐만 아니라 더 많은 미술상이 고흐의 그림을 취급했다면, 더 많이 판매되었을 가능성이 당연히 높다.
게다가 고흐는 완전히 무명도 아니었다. 아직 대중들이 모르는 단계였을 뿐이지, 이미 화가들 사이에서는 천재로 유명했다. 고흐보다 명성이 높았던 고갱이 직접 아를로 찾아와 같이 그림 그릴 것을 자청하기도 했으며, 로트렉이 그의 그림을 아주 높이 평가한 기록도 남아있다. 실제로 고흐의 그림만을 모은 전시회가 열린 건 그가 죽은 지 2년밖에 안 되었을 때였다.
이 이야기는 즉, 고흐가 3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게 아니라 피카소처럼 91세에 죽었다면(…) 그에 버금가는 영광을 생전에 충분히 누릴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재능뿐만 아니라 시간도 필요하다는 가설
이런 케이스는 우리나라에도 있다. 전 국민이 다 아는 유재하 이야기다. 유재하는 데뷔 음반을 내고 얼마 되지 않아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의 나이가 겨우 25살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유재하의 첫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이 된 <사랑하기 때문에>는 당시 유재하가 자신의 돈 800만 원을 들여 제작하고 작사, 작곡, 편곡까지 한 앨범이었다. 하지만 발매 직후에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클래식과 가요를 접목한 앨범이라 하여 이상한 취급을 받기도 했다고.
음반은 1987년 4월에 발매되었다. 그는 10월 31일 새벽에 사망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시작됐다. 갑자기 <사랑하기 때문에>가 놀라울 정도로 라디오에서 많이 온에어되기 시작했다. 이 음반은 지금도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항상 최상위권에 랭크될 만큼 인정받고 있다.
생전에는 고인이 크게 실망할 정도로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사후에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그가 주목받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반년이었다. 그는 그 반년을 넘기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요절한 예술가를 사랑하는 이유
외국에는 ‘27세 클럽’이라는 게 있다. 만 27세에 요절한 천재 아티스트들을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 커트 코베인, 에이미 와인하우스까지 이 클럽에 소속(?)되어 있다. 왜 그들은 20살도 30살도 아닌, 27살에 죽은 것일까? 이런 가설이 가능할 것이다. 예술적 성과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가장 짧은 시간인 동시에, 이길 수 없는 삶의 풍파를 견뎌낼 수 있는 가장 긴 시간이라고.
예술가는 혼자서 예술가로 성장하지 않는다. 삶을 살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그 경험에서 얻은 감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동시에 예술에 필요한 스킬을 익혀서 세상에 공개해도 될 정도의 수준으로 올려놓는다. 여기에 필요한 기간이 이십여 년 남짓이다. 동시에 27세 클럽의 중요 사인 중 하나인 약물, 알콜 중독으로 이어지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얻는 기간 또한 이십여 년 남짓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요절한 예술가들을 사랑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된다. 그들은 그냥 젊어 죽은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짧은 생애를 다 바쳐, 혹은 생애 자체를 불쏘시개 삼아 예술로 승화해낸 사람들이다.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진하게 녹아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젊은 시절에 만들어진 만큼 이전 세대 예술의 영향을 받지 않은 신선한 색깔을 갖추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이 든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영원히 젊고 불안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대중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게 된다.
여기에 예술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인생을 심도 깊게 분석해야만 한다. 어떤 고뇌가 그들의 작품으로 이어졌는지 연결하는 것은, 예술을 이해하는 행위의 가장 첫 번째 단계이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생애, 소설로 만나다
말하자면 소설 <잔잔한 파도에 빠지다>는 이 과정을 소설로 풀어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 죽은 젊은 천재 뮤지션이 어떤 과정을 거쳐 뮤지션으로 완성되었는지, 어떤 죽음을 맞이하는지, 사후에도 사람들에게 음악이 기억되는 과정은 어떤지 천천히, 그리고 여러 시점으로 보여주는 일대기이기 때문이다.
첫 에피소드의 주인공 ‘하루카’가 이 뮤지션을 알게 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업무 속에 파묻혀 살아가는 평범한 회사원 하루카는 어느 날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잔잔한 파도에 빠지다>라는 음악을 만난다.
이 음악은 이전의 어떤 음악과도 다르고, 그래서 하루카의 내부에 숨어있던 열정과 삶에 대한 기대감을 이끌어낸다. 그런데 새로운 아티스트를 알게 된 기쁨도 잠시, 그 곡을 만든 아티스트 ‘기리노 줏타’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소설의 시점은 기리노 줏타의 삶을 천천히 조망하기 시작했다. 그는 왜 죽었을까? 이 음악은 어떻게 발굴되기 시작했을까?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렇게 소설은 줏타의 탄생부터 첫사랑, 친구들, 마지막 순간에 같이 있던 여자친구의 이야기까지 천천히 보여준다.
그것은 엄청나게 특별한 순간이 아니다. 무척 일상적이고 사소하고, 조금은 마음을 흔드는 순간들일 뿐이다. 하지만 줏타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음악에 매진한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깨닫게 된다. 예술가는 자신이 지나쳐온 정서를 잊지 않고 기록하는 사관에 가깝다고. 기록을 계속하는 그 끈질김과 창의성이 그들을 위대한 예술가로 만드는 것이라고.
그래서 이 소설 속에서 사후의 명성이 쌓여가는 과정은 더 상징적이다. ‘기리노 줏타’라는 예술가는 죽었지만, 그의 음악을 담은 유튜브 영상은 끝까지 남아 새로운 리스너를 만들어 낸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삶을 담은 곡이 남아 사람들을 위로한다. 죽음과 관계없이, 예술은 예술가를 떠나 홀로 자립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소설은 음악을 만드는 예술가뿐 아니라 음악을 듣는 ‘청중’, 즉 주변 인물에게도 시선을 보낸다. 주인공 기리노 줏타를 중심으로 등장하는 다양한 주변 인물들이 그들이다. 그들의 삶에는 공통적인 지점이 있다. 바로 설렘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회사원은 회사원대로 지쳐 있고, 밴드 멤버들은 꿈을 잃었으며, 가장 벅찬 시기를 보내야 할 학생들마저도 자신을 둘러싼 상처에 기진맥진해 있다. 마치 실제 우리의 삶처럼. 그리고 그들에게 주인공 줏타의 음악은 잊고 있던 꿈과 설렘을 꺼내 준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중학교 시절 듣던 음악을 우연히 길거리에서 들었을 때의 설렘,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대변하는 듯한 음악을 보물처럼 찾아냈을 때의 설렘.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 감정을 다시 떠올려낼 수 있을 것이다. 한때 우리를 설레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라고.
막 이십대가 된 천재 작가가 전하는, 삶을 읽는 새로운 방식
아이러니한 건, 작가인 아오바 유가 이제 막 이십대 초반이 된 아주 젊은 작가라는 점이다. 심지어 그는 십대 후반에 일본 문단에 등장했다. 말하자면 그도 ‘천재 작가’ 수식어를 듣는 축에 가깝다는 것이다. (너무 젊어서 ‘27세 클럽’에는 도전도 못 하는 나이다…;)
그의 나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역시 그의 소설 또한 젊은 예술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 예술과 다른 신선한 형식과 시선 말이다. 예를 들어 예술과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오히려 이를 부담스럽지 않고 산뜻하게 다룬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10~20대의 젊은이들로, 독자들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어 공감할 부분이 많다. 게다가 문체 또한 청춘 소설에 가깝게 느껴질 만큼 가벼우면서도 서정적이다.
그러면서도 한국 사람들이 거북해하는 일본 특유의 꼬이거나 불편한 감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감정들은 부드러우면서도 보편적이다. 그래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매니아들이나 청춘 시절을 통과하는 20대들, 혹은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는 독자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깊은 주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이지 리딩 소설이다. 머리 아프게 고민할 부분이 없다. 여행지에 한 권 들고 가기에도 좋고, 자기 전 가볍게 읽기에도 좋다. 한 인간의 생애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면서도, 마음의 그리운 부분을 자극한다. 마치 어린 시절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듣는 것처럼 그리운 감각에 빠지게 될 것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해 보자.
아, 이 소설의 제목은 모두 곡 제목이다. 함께 들으면서 읽어 보자. 음악과 글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족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니까, 함께 즐기면 감상이 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