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런던 소더비 경매 현장. 사회자가 망치를 세 번 두들기며 낙찰을 알렸다. 소녀가 그려진 그림의 경매가는 무려 140만 달러. 그때 사람들은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별안간 그림에서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림이 액자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액자 속에 숨겨진 칼날이 그림을 여러 가닥으로 잘랐다.
사람들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액자만 바라보던 그때, 한 남자가 조용히 경매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그 장면을 찍은 영상을 업로드했다. 이런 메시지와 함께.
Going, going, gone…
그 그림은 <풍선 든 소녀>라는 작품이었으며, 그 남자는 그림에 파쇄기를 설치한 장본인인 예술가 Banksy 본인이었다. 이 소더비 경매는 일반인들에게도 뱅크시의 작품을 알린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반쪽 남은 그림값은 더 치솟았다
얼굴 없는 천재, 예술 테러리스트, 거리의 미술가. 모두 뱅크시를 부르는 별칭이다. 그의 작품은 최고 224억 원에 거래되었다. 그가 그림을 그린 골목은 그대로 땅값이 뛰어 버린다. 바야흐로 21세기의 제일 핫한 아티스트 중 하나인 셈이다.
그의 그림이 이렇게 많은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한때 사회에서 천대받던 그래피티 아티스트이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밤에 조용히 나타나 기존의 기물을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그림을 그리고 떠난다. 그 작품 제작 방식은 실로 ‘쿨하고 힙’하다. 하지만 이게 다일까? 뱅크시는 과연 힙한 모습만으로 이렇게 명성을 쌓은 것일까?
다른 측면을 보자. 뱅크시는 호텔의 오너이기도 하다. 호텔의 이름은 ‘The Walled Off Hotel(월드 오프 호텔)”. 트립어드바이저의 평가는 “아주 좋음”이고, 부킹닷컴에서는 10점 만점에 9.6점을 기록한 엄청난 평점의 호텔이다. 특히 커플들이 선호하는 호텔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객실은 10개에 불과하다. 호텔의 구석구석마다 뱅크시의 그림이 가득하고, 다른 아티스트의 작품도 찾아볼 수 있다. 외관 또한 이국적이다. 그래서 얼핏 보면 잘 꾸며진 부티크 호텔이라는 느낌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게 전부일까? 중요한 것은 이 호텔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느냐, 이다.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 중 하나다. 아기 예수가 탄생한 도시이자,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분쟁을 겪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영토를 가르는 8미터 높이의 분리 장벽이 세워져 있다.
더 월드 오프 호텔은 바로 이 장벽을 마주 보고 있다. 그래서 하루에 해가 드는 시간이 약 25분에 불과하다. 객실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라고는 굳건하게 서 있는 장벽뿐이다. 그뿐인가? 운이 나쁘면 양쪽 하늘을 가로지르는 미사일을 보게 되고, 폭발음까지 경험하게 된다. 실제로 이 호텔의 별명은 ‘세계에서 가장 전망이 나쁜 호텔’이다. 실내에 가득 찬 미술품은 이스라엘의 억압과 팔레스타인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들뿐이다.
왜 뱅크시는 자신의 호텔을 이런 곳에 세웠을까? 그저 호텔의 명성에 이끌려 왔을 투숙객들이 왜 이토록 적나라하게 괴로운 참상을 목도하게 만들었을까? 바로 거기에 예술가 뱅크시의 작품 세계를 가로지르는 의도가 숨어 있다. ‘바로 여기, 이런 현실이 있다’라는.
2018년, 뱅크시는 뉴욕 맨해튼 바우워리 지역에 또 다른 작품을 남겼다. 무척 거대한 작품으로, 숫자를 세는 듯한 막대기가 다섯 개씩 짝지어 커다란 벽을 채우고 있다. 막대기 너머에는 한 여성의 얼굴이 가려져 있다.
이 여성의 이름은 제흐라 도한. 터키의 아티스트이자 저널리스트다. 그녀는 쿠르트 테러에 대한 작품을 그렸다는 이유로 수감 중이었다. 뱅크시는 그녀의 사건을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이 작품을 그렸다. 작품의 이름은 <FREE ZEHRA DOGAN>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2005년 예루살렘에서는 동성애자 퍼레이드가 열렸다. 일견 평화롭게 시작하는 듯하던 퍼레이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과격 분자들에게 매복 공격을 당했다. 이 퍼레이드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이 칼에 찔리고 부상을 입었다. 이후 뱅크시는 <꽃을 던지는 남자>라는 작품을 제작했다. 작품의 의미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 테러 사건을 다룬 것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의 작품은 단순히 예술적 영감이나 충동의 산물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전 세계적이건 국지적이건, 동 세대가 겪고 있는 갈등과 아픔을 다룬다. 그는 언제나 평화와 반전을 그린다. 전쟁과 아동 빈곤, 환경이라는 주제는 그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들이다. 뱅크시는 자신의 널리 알려진 이름을 통해 이 주제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길 바란다. 그래서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오는 2021년 7월, 뱅크시의 작품이 한국을 찾는다. 7월 30일부터 열리는 “아트 오브 뱅크시(The Art of Banksy Without Limits)”는 다양한 뱅크시 전시 브랜드 중에서도 큰 규모를 자랑한다.
‘아트 오브 뱅크시’가 다른 브랜드와 차별화되는 이유는, 단순히 유명 작품을 선보이는 게 아니라 뱅크시가 전하고자 하는 사회적 목소리를 반영하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아트 오브 뱅크시의 기획자이자 회장인 케말 귀르카이낙은 이렇게 전했다.
이 전시를 통해 한국의 관람객들이 뱅크시가 보는 세상을 공유하고, 뱅크시가 던지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아트 오브 뱅크시는 7월 30일부터 6개월간 서울숲 갤러리아 포레 더서울라이티움에서 전시한다. 아시아 투어 중 서울에서 최초로 개최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그림, 조각, 벽화, 설치물 등 150여 점의 뱅크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전시회에 와서 뱅크시의 예술 세계를 느껴보자. 그리고 그가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 보자. 우리가 공들여 보지 않았던 세계의 진짜 모습이 나타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