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라, 허나 사랑에 속박되지는 말라. […]
서로의 잔을 채우되, 어느 한 편의 잔만을 마시지는 말라. […]
함께 노래하며 춤추며 즐거워하되, 그대들 각자는 고독하게 하라.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중에서 ‘결혼’에 대한 부분이다. 결혼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이전의 어떤 연애보다 더 깊이 모든 생활을 공유하게 된다는 점일 것이다.
사회마다 결혼의 의미가 다르긴 하지만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양가 부모님 등 가족들의 사정까지 서로 깊이 알게 되면서 생활의 일부가 되어간다는 걸 의미한다. 연애 때와는 다른 밀착감이 생기고, 서로가 서로의 삶의 일부가 되어간다. 그러나 결혼이건 연애건 그 핵심은 달라지지 않는다. 핵심은 결국 두 사람이 사랑의 관계를 이룬다는 점이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연애하는 사람들보다 결혼한 사람들의 사랑을 의심하곤 한다. 그들은 과연 서로 사랑하는 걸까? 어쩔 수 없이 같이 사는 건 아닐까? 흔히 말하듯 사랑이 아닌 정으로 사는 게 부부 아닐까? 그렇게 보면 결혼이라는 문제 안에 들어 있는 사랑의 문제야말로 어쩌면 가장 깊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결혼이 사랑의 위기가 된다면 아무래도 그 가장 큰 이유는 너무 오래, 너무 함께 지내면서, 하나가 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서로 결합되기를 원하지만, 막상 그렇게 되고 나면 사랑의 위기가 시작되기도 하는 셈이다.
서로에 대한 환상이 부서지고, 너무 오래 지내면서 모든 걸 다 알게 되어 흥미가 사라지고, 더 이상 할 이야기나 재미있는 놀이도 없어 질려가게 되는 것이 사랑과 결혼의 역설일지도 모른다. 그런 결혼에 대해 칼릴 지브란은 말하는 것이다. “그대들 각자는 고독”하라고 말이다.
너무 근거리에서 살아가다 보면 때론 상대가 나와 완전하게 독립된, 그만의 내면세계를 가진,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고독의 영역에 있다는 걸 잊어버리곤 한다. 상대에 대해 모든 걸 아는 것만 같지만, 사실 나는 이 순간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100% 알 수 없다.
함께 놀러 간 한강공원에서 예전 연인을 생각할 수도 있고, 내가 시큰둥한 동안에 상대는 무척 큰 기쁨을 느낄 수도 있고, 나의 걱정과는 전혀 다른 걱정에 몰래 몰두할 수도 있다. 상대가 그렇게 자기만의 고독과 내면을 가진 존재라는 진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상대가 자기만의 내면을 가진 고유한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일상도 조금은 달라진다. 나는 자기만의 감각과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한 명의 존재와 함께 걷는다. 그러면 그의 기분이나 마음이 궁금해진다. 그에게 지금 이 산책의 기분은 어떠하냐고, 오늘은 어떤 마음이냐고 묻게 된다.
그렇게 나는 상대의 마음을 알게 되고, 또 그와 비슷하거나 다른 나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당연한’ 존재가 될 뻔했던 내 곁의 사람은 한 명의 고유한 존재로 내 곁에 서게 된다. 나와 당신은 함께 있지만, 동시에 거리를 가진, 고유한 존재자로서 존재하게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이 고유한 존재로 다시 자리 잡게 되면, 우리가 함께 있는 이 순간조차 하나의 결단이 된다. 당신은 나와 당연히 같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 순간조차 나와 함께 있기로 결단한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내게 당신도 그저 당연히 여기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함께 있고자 결단한 사람이다. 그렇게 사랑은 매일 확인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매일 확인되는 사랑은 그만큼 도망갈 여지가 줄어든다. 함께 있음이 사랑의 위기였다면, 함께 있음을 확인하는 일은 사랑의 기회가 된다. 그렇게 함께 있으되 고독한 일은 당신과 나를 끊임없이 ‘사랑하는 관계’로서 이 자리에 다시 놓아둔다.
원문: 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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