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언제 돈 모아서 언제 결혼할래?”
퇴사 후 엄마와 나는 인생 주기 때문에 매일 다투는 것 같아요. 모아 놓은 돈은 없고, 회사는 안 다니는 데다 지금 만나는 남자 친구와는 장거리 연애를 앞둔 대한민국 30세 여성, 바로 저예요.
엄마가 세워놓은 인생 주기에 따르면, 23–24세쯤 졸업 후 취직을 하고, 4–5년 정도 돈을 5,000만 원 정도 모은 다음, 누군가와 최소 2년은 만난 후 30살까지는 결혼을 해야 하는데, 저는 그 모든 사이클을 벗어나 버렸으니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할지 짐작은 가요. 그런데 엄마, 많은 청년이 경제적 문제 때문에 비혼주의자가 되는 시대에 적어도 제가 ‘결혼 안 해!’라고 선포하진 않으니, 엄마에겐 얼마나 다행이에요. (웃음)
사실, 저는 스웨덴으로 유학을 가기 전까지 ‘결혼은 절대 안 해야지’라고 마음먹었어요. ‘결혼 후 집안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없으면 어떡하지? 출산 후 내 책상이 없어지진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컸던 게 이유죠. 내가 하고 싶은 일, 살고 싶은 삶을 위해 공부하고 도전하며 살았는데, 결혼 후 여자라는 이유로 내 꿈과 노력이 물거품 되는 것이 너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아이를 낳는 기쁨도 상상해봤지만, 친구들로부터 전해 듣는 ‘여자 선배의 사라진 책상’에 관한 흉흉한 소문은 무서웠고, 내 아이가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행복할 것 같지 않았어요. 가부장적 결혼 생활과 경쟁적인 교육 제도는 바뀔 것 같지도 않았죠. 혼자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재밌게 살아야겠다 마음먹었죠. 한국에서 결혼도 출산도 희망이 없겠구나 하고요.
그런데 스웨덴에서의 삶은 제 결혼관을 180도 바꾸어버렸어요. 결혼이 하고 싶어졌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가정을 꾸리고 싶어요.’ 스웨덴에서 육아와 일을 병행할 수 있으며, 출산 이후에 내 책상이 사라질 걱정은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또, 가정이 있는 스웨덴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가족이 삶에 가져다주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도 느꼈어요.
유학 첫날 만난 스웨덴 친구 이다는 그날 제게 임신했다고 알려줬는데, 벌써 아이는 유치원에 다녀요. 이다는 출산 직전까지 학교를 다니고, 아이를 낳았어요. 1년 동안 휴학을 하고, 2년 차에 복학했죠. 2년 차에는 남자 친구가 1년간 육아휴직을 냈어요. 이다와 남자 친구는 결혼은 하지 않았어요. 임신하고 학교를 다니는 것도, 결혼하지 않고도 합법적으로 관계를 인정받는 것도 문화 충격이었어요.
이다는 아이를 낳고 난 후, 늘 똑같던 일상이 매일 다르대요.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 매일매일이 소중하고 신비하대요. 2년 동안 이다와 이다 남자친구의 육아를 지켜보고 아이와 놀면서, 제 마음속에도 아이를 기르는 기쁨이 피어났어요. 저보다 더 어린 친구 두 명이 작은 생명체에 지니는 책임감이 존경스럽기도 했죠.
내가 이다였다면 똑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고민해봤는데 금세 포기했어요. 임신한 몸으로 학교를 다니고, 회사생활을 시작하는 게 한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니까요. 이다와 이다 남자친구는 스웨덴 사회제도 덕분에 안정적으로 비교적 어린 나이에 육아와 학교, 직장생활을 병행할 수 있다고 했어요. 스웨덴의 유급 육아휴직 제도와 삼보(Sambo) 제도 덕분이죠. 물론 스웨덴 사회도 완벽한 사회는 아니지만, 도움 되는 인사이트를 엄마와 나누고 싶어요.
스웨덴의 육아휴직
스웨덴에서는 엄마 아빠가 쓸 수 있는 ‘유급’ 육아휴직이 총 480일이에요. 13개월 동안은 월급의 80%를 받다가, 이후에는 국가가 지정한 금액을 수령해요. 스웨덴에서 합법적으로 최소 240일 이상 일한 사람들은 이 육아휴직 제 도를 이용할 수 있어요. 인상 깊은 점은 부모 각각 반드시 90일은 써야 한다는 거예요. 육아에서도 성 평등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죠.
사실 스웨덴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남성들이 대부분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여성들이 집에서 일하는 사회였어요. 하지만 1974년 스웨덴 사회보험청에서는 최초로 스웨덴 유급 육아휴직 제도를 만들고, 남성들이 육아휴직 제도를 선택하는 가정에 다양한 세제 혜택과 지원수당을 늘려 남성 육아휴직을 장려했죠. 유급 육아휴직 제도의 마련은 스웨덴의 경제부흥을 위한 정책과도 연관된다고 해요. 경제 활동 인구수가 늘어나야 세수가 증대되니까요.
스웨덴 정부는 여성들도 경제 활동에 참여하길 원했죠. 그런데 가사와 육아는 여성들이 일을 하는 데 걸림돌이 됐어요. 즉 경제 성장, 세수 확보, 국민 모두의 행복한 삶을 위해 제도를 발전시킨 결과, 스웨덴은 전 세계에서 남녀가 가장 평등하고, 여성 노동인구가 많고 남성들의 육아휴직 참여율이 높은 나라로 발전했어요. 굉장히 실용적인 접근이라 생각했어요! 저성장, 맞벌이 가구의 증가, 출산율 저하에 맞닥뜨린 한국 사회에도 필요한 사고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여전히 스웨덴에서는 남성보다 여성이 이용하는 육아휴직일이 길고, 여성의 가사노동 비율이 남성보다 좀 더 높아요. 그래서 480일의 휴직일을 남녀가 동등하게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논의도 있다고 해요. 모든 건 참 상대적이지 않나요? 우리가 복지 천국, 성 평등의 선진국이라 여기는 스웨덴에서도 여전히 성 평등 논의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니까요.
저는 사회는 조금씩 진일보한다고 생각하는데, 한국과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던 스웨덴의 사례가 저는 우리나라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의 더 많은 엄마아빠들이 육아와 사회생활을 병행할 수 있는 문화와 제도가 마련되면 좋겠어요.
결혼도 동거도 아닌, 삼보
엄마, 제가 엄마가 들으면 또 대발노발할 스웨덴 이야기를 하나 더 얘기해드리려고 해요. 제가 앞서 결혼이 아니라 ‘가정을 꾸리고 싶다’라고 말씀드렸죠? 동거, 사실혼이 터부시 되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 딸이 미쳤나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엄마, 스웨덴에는 결혼도 아닌, 동거도 아닌 삼보라는 제도가 있어요. 스웨덴어로 ‘삼만보엔데(Sammanboende)’, 함께 산다는 의미예요.
스웨덴에서는 삼보 관계인 커플을 많이 만날 수 있어요. 제 친구 이다도 남자 친구와 삼보 관계예요. 1970년대 스웨덴에서도 경제적 문제로 결혼하는 커플이 많이 줄고, 동거하는 커플이 많이 늘었대요. 자연스레 출산율도 떨어졌죠. 그래서 정부에서 동거하는 커플을 합법적인 관계로 인정해주고, 동거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에게도 법적으로 똑같은 권리를 보장해줬어요. 스웨덴이 사회경제적인 정체를 겪을 때마다 굉장히 실용적으로 접근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혼한 커플과 삼보 커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자산 소유권의 권리에요. 삼보 커플은 결혼 법이 아닌 삼보 법의 적용을 받아요. 결혼한 커플이 모든 자산 소유권을 공유하는 것과 달리, 삼보 커플의 경우에는 함께 사는 집은 공동 소유로 귀속되지만, 은행 계좌, 가구, 자동차, 별장(스웨덴에서는 대부분의 가족이 조그마한 별장을 소유) 등의 자산은 합치기 전 이를 소유했던 사람의 개인 자산으로 여겨져요. 자산의 소유권은 각자가 삼보로 합칠 때 유언장이나 증거로 서로 합의한 바를 명시해놓는 게 좋다고 해요.
제가 스웨덴어를 처음 배울 당시, 교과서에서도 처음 만난 사람들이 파트너를 소개할 때 ‘나의 삼보/ 와이프/ 남편’이라고 구분 짓는 것에 엄청 놀라기도 했어요! 심지어 스웨덴의 모든 공식적인 문서에도 결혼 유무를 묻는 칸에 ‘미혼/기혼/삼보’가 표기되어 있어요. 삼보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형태의 관계인 거죠. 스웨덴의 삼보 커플은 평균적으로 3–5년 정도 살고 아이가 생길 때 결혼을 하거나, 평생 삼보 관계로 남기도 한대요.
삼보 관계는 혼인 관계와 형태는 다르지만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 맞춰가고 책임을 다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다 생각해요. 또 법적으로 삼보 커플의 권리가 결혼한 커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고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덕분에, 삼보 커플은 사회의 합법적인 공동체로 행복을 일구며 살아가요. 관계의 형태를 막론하고 개인과 개인의 결합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를 향한 사랑과 책임감이지 않을까요? 관계의 본질은 형태가 아닌 그 속에 담긴 가치라 생각해요.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음에도 타인의 시선 또는 아이에게 돌아갈 화살 때문에 결혼 관계를 유지하는 건 당사자와 아이에게는 더 큰 불행이라 생각해요. 아이와 가정의 책임은 중요한 일이지만, 제도가 개인의 행복을 옥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다양한 사회제도를 통해 결혼이나 양육과 관련해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품어주거나요. 혼인은 법적으로 관계를 인정해주는 제도잖아요. 그런데 그 제도가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방해하면 제도의 본 기능을 제대로 하는 걸까요?
평생 다른 삶을 산 두 사람이 합치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이겠죠? 사소한 생활 습관부터 삶의 철학까지 다른 점투성이죠. 엄마의 결혼 생활을 돌아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웃음) 그래서 저는 동거도 합리적인 선택이라 생각해요. 엄마는 ‘얘가 큰일 날 소리 하네! 그러다 책임지지 못할 일이 생기면 어떡하려고! 남들이 욕한다’라고 말씀하시잖아요. 하지만 엄마 요즘 대학가에 가면 동거하는 커플이 그렇게나 많대요(다 부모님한테는 비밀로 하고요).
월세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랑 생활하며 서로 지지고 볶고 화해하는 과정에서, 관계도 성숙하고 저 자신도 성숙하지 않을까요? 물론, 건전한 성인지를 바탕으로 (엄마가 생각하는) 책임지지 못할 일은 조심해야겠죠? 아니면 책임을 져야죠. 그리고 남들이 내 삶을 살아주는 게 아니잖아요. 저는 삶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2년 동안 살면서 느낀 스웨덴 사회는 ‘모든 개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곳이었어요. 그리고 제도적으로 소외되는 개인이 생기지 않도록 시스템을 만들고, 문화를 정착시키려 노력하죠. 스웨덴 사회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평등’이 사회 곳곳에 뿌리내려져 있다는 걸 몸소 실감한 2년이에요.
우리 개개인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예요. 그리고 모두 ‘행복’을 목적으로 살잖아요. 그런데 우리 모두는 모두 다르게 태어났고, 다르게 생각하며 살아요. 하지만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사회적 존재로서 인정받는 일은 모두에게 차별 없이 적용돼야 하는 일이라 믿어요. 그래서 사회는 시대적 요구에 맞게, 변화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철학과 양식을 읽고, 그에 맞는 문화와 제도를 만들어나가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모든 사람이 진정한 자유와 자아실현 하는 것을 돕기 위해 국가는 국민의 집이 되어야 한다.
스웨덴의 복지제도의 기틀을 다진 총리 올로프 팔메의 말이 가슴 깊이 와 닿는 하루네요. 지금 당장 제가 한국 사회 제도를 바꿀 순 없지만, 적어도 저는 저만의 결혼에 관한 철학과 가치를 마련해나가고 싶어요. 그리고 이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 엄마의 동의도 필요하고요!
엄마는 한국은 우리에게 어떤 집이라 생각하세요? 그리고 엄마는 제게 어떤 집이 되고 싶으세요? 당장 사회제도는 못 바꾸더라도, 우리 집의 문화는 엄마와 내가 많이 소통하며 만들어나가길 바라요. 그렇다고 무작정 동거하겠다는 말은 아니고요, 터부시되는 것들을 열어놓고 이야기해보면 좋겠다는 말이에요.
엄마와 나를 이을 세 번째 다리를 놓아요. 유별난 딸이 보통의 엄마에게.
원문: 도크라테스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