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결혼에는 이혼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두 부부가 있는데, 얼마 전 이 부부들도 결혼 초기에는 그렇게 이혼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밖에도 살아가다 보면 문득문득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사람의 어떤 결점이나 부족한 점, 문제점을 마주했을 때 ‘이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났더라면, 이 부분이 더 완벽한 사람을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한 번쯤은 해보게 된다.
이는 마치 어느 직장에 속한 모든 사람이 한 번쯤은 이직이나 퇴직을 상상해보는 것과 비슷하다. 누구나 선택의 자유라는 게 있는 시대이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은 ‘선택 가능성’의 지배를 받는다. 과거 한 시절에는 이혼 자체가 불경하거나 불가능한 것이라 여기던 시절이 있었고, 직장도 평생직장의 개념이 확고하고 심지어 직업도 천직 개념이 공고해 다른 선택의 여지를 상상조차 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모든 사람이 삶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선택의 가능성과 압박을 받고, 그로 인해 인생 전체를 바꿀 수 있다는 환상 또한 떨쳐낼 수 없다. 그렇기에 이미 평생직장, 단일 직업이라는 개념은 오래전에 깨졌고 일부일처제라는 제도 자체도 여러모로 균열을 일으키는 듯하다. 인간의 내면 자체가 ‘선택적’이 되었는데 결혼 이후의 삶은 ‘불변’을 강요하므로 이는 근원적으로 불일치할 수밖에 없는, 모순 그 자체를 끌어안으며 이어지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내가 혹여라도 ‘이혼’을 생각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내가 잘못 결혼한 것이 아닌가 스스로 의심하는 일이 되고, 나만 잘못된 것이 아닌지 고민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일이고 이 시대의 숙명이자 운명 같은 것이다. 우리는 평생 선택해야 한다는 요구를 느끼지만, 삶의 많은 것은 선택하기 어렵다.
이런 분열적인 양상은 인생 전반을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것 같다. 우리는 선택이 당연한 것이고, 선택이 옳은 것이며, 끊임없이 선택해나가는 일이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는 일이라 느낀다. 꿈이든, 연인이든, 배우자든, 자식 계획이든, 사는 동네든, 직업이든, 살 곳이든 항상 더 ‘나은 것’이 있다는 상상이 평생 주어진다.
“더 나은 선택지가 있고 나는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명제는 무척이나 강렬하다. 이 명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문제는 실제로 그런 끊임없는 선택으로 인해 더 나은 삶으로 계속해서 다가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다. 선택은 환상이면서 동시에 현실이다. 그런데 반대로 그 ‘선택 가능성’ 때문에 삶을 엉망으로 만든 사람도 많이 보았다.
사실 삶에서 가장 정확한 선택, 현명한 선택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자기 삶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해왔던 모든 선택들이 옳았던 것이라 믿는다. 반대로, 삶이 엉망이 된 사람들은 자기 삶의 무수한 선택들이 어리석은 것이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내가 계속 느끼는 것은 언제나 선택 그 자체보다도 선택 이후가 더 중요했다는 점이다. 물론 삶에는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게 있을 테지만, 최고의 선택이 무엇인지는 신이 아닌 이상 누구도 알 방법이 없다.
공무원을 선택해 나름대로 만족하는 삶을 살지만, 공무원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유명한 연예인이 되어 더 화려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삶의 차이란 내가 선택한 공무원의 삶에 만족하는가, 아니면 연예인의 삶을 끊임없이 동경하는가에 있을 것이다. 그중에는 공무원의 삶을 포기하고 자신이 꿈꾸던 연예인이 되는 경우도 있을 테고, 결국 연예인은커녕 공무원마저 잃은 삶도 있을 것이다.
삶이 이렇듯 끊임없는 선택의 요구와, 그렇게 선택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차원에 놓였다는 것은 여러모로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라면, 이런 시대에서, 무엇보다도 그 어떤 선택도 완벽할 수는 없고, 내가 끊임없이 해왔던 선택들 속에 있는 좋은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하고자 할 것 같다. 선택 이후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환상은 사라진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는 그저 종교가 같고, 영화와 음악 취향이 비슷하고, 농담을 주고받는 일이 너무 어울려서 놀랍고 신비롭다가도, 이윽고 그런 선택의 이로움은 너무 당연한 것이 되고, 덜 소중한 것이 된다. 내가 그토록 꿈꾸던 직장에 들어섰을 때도, 최초의 감격은 무뎌지고, 내가 누리는 것들이 그저 당연한 것이 되어, 다른 채움, 새로운 자극, 또 다른 측면에서의 충족을 바라게 된다.
그러나 삶에서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게 있다면 다른 선택에 대한 상상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그 상상이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선택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파괴해야만 성립할 수 있는 종류의 환상이라면, 아무리 더 조심하더라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나보다 현재의 내가 언제나 더 현명하다고 믿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과거의 나, 미래의 나와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현재의 상상도, 선택도, 환상도 조절하면서 나아가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자주 느낀다. 삶이 선택에 놓인다는 것은 멋진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무서운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