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자신이 3루타를 친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간다.
얼마 전 이 문장을 한 신문의 특집기사 글머리에서 발견했다. 미식축구 선수 출신 감독인 배리 스위처 씨가 한 말이라고 한다. 우리 시대의 화두 중 하나인 능력주의의 이면을 돌아보게 하는, 촌철살인이 돋보이는 문장이다.
페이스북 타임 라인에 문장을 게시했다. 172명이 ‘좋아요’를 눌렀고, 14명이 댓글을 달았다. 일상을 소재로 하는 게시물들에 대한 반응보다 뜨거웠다. 댓글들 또한 모든 내용이 비판보다 공감과 동의를 기조로 했다. 능력주의에 대한 반발이나 비판적인 시각을 반영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열흘쯤 지난 뒤였다. 책 몇 권을 살 게 있어 동네 서점에 들렀다가 대니얼 마코비츠의 『엘리트 세습』이라는 책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책 제목도 제목이었지만 “중산층 해체와 엘리트 파멸을 가속하는 능력 위주 사회의 함정”이라는 부제와, 책 뒤표지의 “새로운 엘리트는 어떻게 탄생했으며, 어떤 식으로 지위를 세습하고 있는가?” 같은 홍보 문구가 내 눈길을 강하게 사로잡았다.
나는 수년 전부터 능력주의가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처럼 각광을 받는 현실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시험만큼 공정한 것이 어디 있는가’, ‘정규직이 부러우면 실력껏 시험을 쳐서 정규직이 되면 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오가는 대화에 끼어들어 토론하고 싶어도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치기 힘들 것 같았다.
2018년쯤엔가 지인을 통해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쓴 『능력주의의 출현(The Rise of the Meritocracy)』 번역본을 챙겨 읽은 적도 있었다. (2020년에 이매진 출판사에서 재번역본이 나왔다.) 그러나 여기서도 능력주의를 속 시원하게 논파할 만한 논리를 찾기 어려웠다. 그럴 만했다. 대체 실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을 받는다는 능력주의의 기본 원칙을 어떻게 비판할 수 있겠는가.
마코비츠의 논리는 단순하다.
- 가. 귀족주의는 태생과 가문 세습에 따른 불평등 구조를 바탕으로 한다. 이에 대한 저항 논리가 능력주의다.
- 나. 그러나 능력주의와 귀족주의는 큰 차이가 없다. 귀족들처럼, 능력주의 전사가 된 엘리트 계층은 자녀들에게 자기 능력을 상속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투자한다.
- 다. 이렇게 능력주의가 사회 각 부문으로 퍼져 나갈수록 불평등 구조가 강화된다.
- 라. 그런데 능력주의 전사들이 갖춘 미덕이 이미 경제적 불평등의 산물이다.
- 마. 그러므로 개인의 기량, 능력, 노력에 따라 보상이 주어진다는 능력주의의 공정성은 신화이다.
마코비츠는 가–마를 뒷받침하고 독자들에게 설득을 구하기 위해 미국의 정치, 사회, 경제 분야를 중심으로 한 방대한 관련 데이터를 수집해 분석하고 정리한 결과를 400여 쪽에 걸쳐 실어 놓았다. 능력 경쟁, 실력대로 공정하게 보상한다는 능력주의는 속임수다!
‘공정’이 시대정신이 되고, 각종 정의 담론이 매스컴과 인터넷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지역 정치인 후보를 시험으로 선발하겠다는 아이디어를 가진 30대 중반의 야당 대표는 실제 자당의 대변인을 경쟁 배틀 방식으로 채용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에게 묻고 싶다. 경쟁 배틀에 참여한 후보자들의 기량과 능력이 온전히 그들 자신의 것일까.
‘대변인’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는 야구 경기가 있다고 치자. 아예 처음부터 3루에서 태어나 출발하는 후보자는 1루에서부터 허겁지겁 달려 나가는 후보자를 간단히 제압하고 대변인 타이틀을 획득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의기양양하게 외치리라. ‘부러우면 능력을 키우든가!’ 이것은 공정도, 정의도 아니다.
한 페이스북 친구는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3루타를 친 것처럼 생각하며 사는 어떤 사람들을 비꼬아 이렇게 말했다. “그런 주제에 남이 자살번트 대주면 지가 잘난 줄 알고 만세 부르며 홈인!” 능력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능력주의 찬양자가 자신의 능력을 어떤 토대 위에서 쌓게 되었는지 깨닫게 하는 것이다. 더 많이 넓게 열고 나누는 민주주의, 그것이 능력주의 이후의 세상을 지배하는 철칙이어야 한다.
원문: 정은균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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