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학생을 전국 1등부터 꼴찌까지 줄 세우고, 수능·고시 등 특정한 방식의 테스트를 통과하면 인정받고 출세하는 길이라고 보는 ‘왜곡된 능력주의’가 짧게는 해방 이후, 길게는 조선시대 과거제도부터 뿌리 깊게 이어져 내려왔죠. 이런 사고방식이 상대적으로 능력이 부족하거나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멸시·혐오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88만 원 세대』 『#혐오_주의』 등의 저자 박권일(43) 씨는 우리 사회에서 지방대 혐오가 심해지는 이유 중 하나로 ‘과잉 능력주의’를 꼽았다. 그는 지난 14일 세명대 저널리즘연구소 전화인터뷰에서 “지방대에 다니는 것이 그 사람의 다양한 능력을 곧장 대변해주는 바로미터가 아닌데도 사회가 공부와 시험 등 몇 가지 한정된 능력만 인정하는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학입시 성적으로 ‘학벌 피라미드’의 아래 칸에 위치하는 순간, 차별과 배제가 당연시된다는 얘기다.
“공부 못 한 사람 멸시 받는 건 당연”
서울대를 졸업한 박지수(29·가명)씨는 “능력에 따라 보상을 달리하는 사회에서 명문대 출신에게 혜택을 주고 지방대 나온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공정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지방대 졸업생의 경우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과 경험을 갖추고 있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양대 4학년 유영희(27·가명)씨는 “맹목적 혐오는 잘못이지만 만약 지방대 출신의 업무 성취도가 낮다는 게 사실로 확인돼 부정적 이미지가 굳어진 경우라면 이는 차별과 혐오가 아닌 합리적 판단에 가깝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사회학자 오찬호 씨가 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에서 한 서울지역 대학생은 지방대생에 대해 “우리 학교보다 대학서열이 낮아도 한참 낮은 곳인데 같은 급으로 취급을 받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했다. 다른 학생들도 “수능점수는 열심히 노력한 결과인데 당연히 보상이 있어야 한다”며 지방대생을 ‘노력하지 않은 사람’ ‘고등학교 때 연애만 하던 사람’ ‘수준 차이 나는 사람’ ‘연예인 얘기만 하는 사람’ 등으로 규정했다.
오 박사는 이 책에서 “이들 대학생은 수능점수의 차이를 ‘모든 능력’의 차이로 확장하는 식의 사고를 갖고 있다”며 “10대 시절 단 하루 동안의 학습능력 평가로 평생의 능력이 단정되는 어이없고 불합리한 시스템을 문제시할 눈조차 없다”고 개탄했다.
지방대생이 지방대생 비하하기도
박권일 작가는 “차별과 혐오를 당하는 피해자조차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스스로 ‘차별당할 만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릇된 인식에 복종하는 경향이 있다”며 일부 지방대생의 사고방식도 우려했다. 그의 이런 진단은 당사자들의 발언에서 확인된다.
광주의 한 사립대 재학생 박찬수(25·가명)씨는 “내가 다니는 대학에 자부심이 떨어지고 자격지심이 들어 스스로를 비하하며 ‘지잡대(지방의 잡스러운 대학)’ 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일이 있다”고 말했다.
경북지역 사립대를 졸업한 김희선(28·가명)씨는 “다른 지방대를 지잡대로 폄하한 일이 있다”며 “자기 위에 ‘인(in)서울’이 있는 것처럼 자기 밑에도 누군가가 있어야 되는 게 사람 심리”라고 말했다. 다른 지방대생을 차별하고 혐오하면서 자신이 밑바닥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에 분노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지방대 출신도 많다. 부산의 한 사립대 졸업생 김정아(30·가명) 씨는 “지잡대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차별주의자’ ‘혐오주의자’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그는 “나를 학교 이름 하나만으로 평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그거 말고도 보여줄 수 있는 게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방대는 대부분 부실대학’이라는 편견
지방대 혐오에는 ‘부실대학, 비리대학이 많다’는 편견도 한 몫 한다. 온라인 참여 백과사전 ‘나무위키’는 지방대를 지잡대라고 부르는 이유 중 하나로 ‘막장 재단’ ‘부실한 교육시설과 커리큘럼’을 꼽았다. “지방대는 학생 교육과 복지에 투자하지 않고 오히려 등록금 횡령을 비롯한 비리를 저지르는 일이 잦다”고 설명한다.
물론 이런 비난을 받을 만한 지방대도 있다. 1996년 김영삼 정부가 최소 요건만 갖추면 대학 설립을 허락하는 ‘대학설립 준칙주의’를 시행한 이후, 4년제 대학만 52개가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운영이 부실한 대학도 나타났다.
신설대학의 92%가 서울 이외 지역에서 문을 열었는데, 이 가운데는 설립자와 친인척을 중심으로 일방적 학과 구조조정, 교수 해고 등의 전횡과 교비·토지 횡령 등의 비리로 물의를 일으킨 학교도 있었다. 이 때문에 2000년 이후 지방 사립대 9곳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지방대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교육부의 전국 대학 경영평가 결과인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평가(2010~2014), 대학구조개혁평가(2015~2017), 대학기본역량진단(2018) 결과를 보면, 일시적 ‘주의’ ‘경고’ 등의 평가를 받은 대학이 전체의 10~20%, ‘부실’ 평가를 받은 대학이 2~6%였고 이중에는 서울 등 수도권 대학도 섞여 있다. 지방대 다수가 부실하다는 것은 편견임을 알 수 있다.
충북 지역 한 사립대 기획과장을 맡고 있는 박용진(48·가명)씨는 “전국 지방대들은 입학생 감소와 등록금 동결 등으로 재정 여건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교육 혁신과 제도 개선에 사활을 걸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일부 학교의 부실과 비리가 전체 지방대에 대한 편견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출신학교 차별 없애고 소득양극화 개선해야
지방대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말이 칼이 될 때』(2018)의 저자 홍성수(43)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는 지난달 11일 세명대 저널리즘연구소 전화인터뷰에서 “지방대 혐오표현 자체에 집중해 그것을 막으려고 시도하기보다는 출신학교로 인한 구조적 차별을 없애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채용할 때 지방대 차별을 줄이고 지방의 교육여건을 지속해서 개선해나가면 지방대 혐오문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조사과 김찬식 조사관은 지난 18일 전화인터뷰에서 “특정대학 출신이 곧 유능한 능력을 가졌다고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게 인권위 의견”이라며 “학교나 기업 등에서 다양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선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학벌, 또 하나의 카스트인가』(2001)에서 대학 서열과 차별 문제를 지적한 김동훈(60·국민대 법대) 교수는 지난 8일 이메일 인터뷰에서 “공공기관과 기업 채용에서 지역출신할당제 비중을 높이고 지역대학에 정부 지원금을 우선 배분하는 등 비수도권 지역대학들에 혜택을 부여하는 제도를 한시적으로라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지방대라는 용어 자체가 서울 등 수도권과 지방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고착화하고 다양한 지역적 특색을 가진 대학들을 획일화하는 언어폭력이 될 수 있다”며 “지방대가 아니라 개별 지역의 이름을 붙여 부르는 운동을 벌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20대 국회에는 지방대 문제와 관련해 학력차별금지법, 출신학교차별금지법 등 5개 법안이 발의돼 있다. 더불어민주당 오영훈(52·제주을) 의원이 대표 발의한 ‘학력·출신학교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안’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학력·출신학교를 이유로 고용, 국가자격 등의 부여, 교육기관의 교육 및 직업훈련 등의 영역에서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을 우대·배제·구별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차별로 규정한다”고 못 박았다.
박권일 작가는 우리 사회의 양극화한 자원분배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서면 엄청난 특권과 면책 등 과잉보상이 주어지고 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겐 엄청난 벌칙과 과도한 고통이 주어지는 사회”라며 “자원을 상위 1~5%에 ‘몰빵’하고 나머지는 그 찌꺼기를 먹고 살아야 하는 승자독식 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지방대 차별과 혐오 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원문: 단비뉴스 / 필자: 장은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