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향력을 남을 위해 아름답게 사용한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자기가 가장 잘하는 일로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기특한 일인가. 변화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면 불편하고 껄끄러운 이슈일지라도 마다하지 않고 품을 수 있는 건 또 얼마나 용기 있는 일인가!
그런 면에서 본다면 미국의 패션 브랜드 ‘피어 모스(PYER MOSS)’의 창업자 커비 진 레이먼드(Kerby Jean-Raymond)는 진정 아름답고 기특하며 용기 있는 사람이다.
커비 진 레이먼드의 피어 모스는 목적의식이 분명한 패션 브랜드다. 그것은 곧 흑인 인권 신장과 인간 평등이다. 또 패션 디자인과 런웨이 쇼에 담긴 의미가 워낙 풍부하다 보니 스토리텔링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브랜드이며, 정치적인 브랜드를 지향하진 않지만 자기주장이 워낙 강해서 결국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브랜드다.
패션과 액티비즘의 중간 지점에 빈자리가 하나 있다면 거긴 피어 모스의 자리니까 양보 좀 부탁드린다!
피어 모스의 런웨이 쇼는 마치 #BlackLivesMatter 운동의 예술 무대처럼 느껴진다. 그곳에선 블랙 아메리칸 내러티브가 다양한 형태로 펼쳐진다. 노래가 있고 미술이 있으며 영상이 있고 무엇보다 의미 있는 이야기가 있는 식이다.
백인 경찰 과잉 진압의 피해자 가족들을 쇼의 맨 앞줄에 초청해 그들을 위로하는 비디오와 퍼포먼스를 선사하기도 하고, 빵빵한 성가대가 블랙 파워를 드러내는 음악을 짱짱하게 부르며 무대를 더욱 빛내기도 한다. 이에 질세라 시인, 래퍼, 소울 뮤지션 등도 등판해 피어 모스의 스토리텔링에 가담한다. 경찰의 잔인성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화이트 워시 되어 잊힌 흑인 카우보이 이야기, 그리고 옛 노예 제도 스토리까지, 주제도 다양하다.
커비 진 레이먼드는 자신을 ‘증폭기’라고 말한다. 모두가 쉬쉬하지만 반드시 논의되어야만 하는 불편한 현실 이야기를 끄집어내 ‘패션’이라는 미디어 속에 녹여 크고 널리 전달하는 증폭기 말이다. 사회(업계)의 불공정, 조직적인 인종 차별주의, 경찰 권력의 잔인성 등을 그는 대놓고 저격한다.
극단적인 인종 차별 사건사고로 매일이 어수선한 작금의 세상 분위기 탓인지 왠지 더 관심이 간다. 올해 초, 미국 역사상 첫 여성이자 유색인종 부통령이 된 카멀라 해리스가 워싱턴DC에 입성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코로나19 희생자를 추모하는 일이었다. 그날 그는 피어 모스의 코트를 입었다. 어째 의도가 꽤 분명하지 않은가?
커비 진 레이먼드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은 패션을 통해 스토리를 전달할 뿐이라고!
그의 스토리텔링은 뜻밖이지만 적시여서 매력적이다. 그래서 그는 트렌디한, 쿨한, 스트리트 스타일의 브랜드라는 수식어를 싫어한다. 대신 그는 ‘정신적인’ 패션 브랜드라는 말을 듣기 좋아한다.
피어 모스의 스타일은 창업자의 마인드처럼 볼드하고, 브랜드가 건네는 다채로운 이야기처럼 컬러풀하며, 그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사회적, 정치적 숙제처럼 난해하고, 우리가 밟고 선 현실 세계처럼 불완전하다. 물론 의도적으로! 지나치게 긴 소매, 뒤틀린 패디드 재킷, 거대한 라펠의 오버코트처럼.
그럼에도 브랜드의 목표는 뚜렷하다. 앞서 이야기했듯 그것은 곧 흑인 자긍심 고취와 인간 평등, 그리고 다양성의 인정이다.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피어 모스를 둘러싼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은 게 커비 진 레이먼드의 꿈이란다.
우린 누구도 배척하지 않아요. 백인에겐 흑인이 필요하고, 흑인에겐 백인이 필요하죠. 우리에겐 모두 서로가 필요해요. 다만 흑인의 자존감을 일깨우는 방식으로 장사합니다. 그게 다예요.
천천히 인정받길 원해요. 커뮤니티원을 모으는 겁니다.
커비 진 레이먼드는 아이티 공화국 출신의 두 부모님 아래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생활하며 10대 초반부터 신발 디자이너의 꿈을 꾸었고, 이에 따라 패션 고등학교에 진학해 어린 나이부터 케이 엉거(Kay Unger) 등의 브랜드에서 인턴 경험을 쌓았다.
여세를 몰아 그는 2013년 자신의 브랜드 피어 모스를 설립했는데, 경찰 권력에 대한 비판을 담은 2015년 뉴욕 패션 위크 쇼를 통해 그 이름을 널리 알렸다. 또한 리복의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새로운 크리에이티브를 실험하는 리복의 사내 벤처 리복 스터디스(Reebok Studies)의 아트 디렉터로 활약 중이기도 하다. 피어 모스가 대중에게 가깝게 다가간 것은 사실 피어 모스와 리복의 컬래버레이션이 큰 몫 했다.
래퍼 카니예 웨스트나 팝스타 리한나와 계약해서 디자이너로 뜨는 방법이라든가 미국에서 패션 디자이너로서 성공하기 위해 밟아야만 하는 어떤 전형적인 절차라는 게 분명 존재한다. 커비 진 레이먼드는 그것을 몇 년이나 따라 해 봤지만 결국엔 모두 자신과는 맞지 않아 나만의 길을 개척해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고 한다.
나만의 길, 그것은 아마도 정치와 사회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불의를 참지 못하는 불같은 개인의 성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업에 적용시킨 부분일 것이다. 흑인 인종 차별이 정점에 이르렀던 2015년, 그는 실제로 뉴욕 퀸즈에서 경찰의 총구 앞에 섰다. 눈앞에 총이 겨냥되는 첫 경험 그리고 정말 발포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 그 길로 그는 특유의 저항 정신과 적나라한 정치적 메시지를 잃지 않고 전하는 ‘패션 디자이너’라는 ‘업’에 헌신하기로 한다.
그 어떤 문도 제겐 열리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문을 직접 만들어야만 했어요.
패션 브랜드 ‘피어 모스’의 매력을 배가하는 건 그것을 둘러싼 ‘이야기’다. 창업자 ‘커비 진 레이먼드’는 스타일 재능과 패션의 핏보다 스토리와 콘텍스트를 중시하는 디자이너다. 의미 없는 옷은 안 만든다고, 패션은 스토리텔링의 도구일 뿐이라고 말할 정도이니까.
패션과 정치를 엮어 보겠다는 시도, 그리고 패션에 저항 정신을 녹여내겠다는 태도.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는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면 어떨까? 여기저기서 냉랭한 비웃음과 걱정의 한숨이 쏟아지지는 않을까? 하지만 피어 모스의 새로운 성공 방정식을 보라. 역시 남들을 따라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고, 성공의 방식은 단 하나가 아니라는 걸 절감한다.
피어 모스의 80%는 스토리텔링, 20%가 상품입니다.
패션 매거진의 브랜드 소개 기사나 디자이너의 인터뷰 기사를 쭉 읽고 나면, 그들의 ‘옷’이 그냥 ‘옷’으로는 안 보이고 ‘이야기’나 ‘철학’으로 보이는 꽤나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흑인들은 대개 비참한 이미지로 그려지죠. 저는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성경과 불교 경전을 ‘종교 서적’이 아닌 ‘문학’으로 받아들여 즐길 수도 있듯이, 한 달에 한두 브랜드씩이라도 패션 브랜드 소개 기사와 디자이너 인터뷰를 찾아보며 탐구한다면 지루한 일상이라는 답답한 방구석에 상쾌한 공기를 들이는 것처럼 훌륭한 인사이트를 적지 않게 얻어낼 수 있다.
원문: 구하다 매거진 / 글: 이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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