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겐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욕망은 생존과도 강력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솜털처럼 순수해 보이는 아기들도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자지러집니다. 어쩌면 아기들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존재일지도 모르지요.
자, 그렇다면 사람은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클까요? 아니면 손실을 회피하려는 마음이 더 클까요? 심리학자이자 행동경제학파인 아모스 트버스키와 대니얼 카너먼은 ‘손실 회피(Loss Aversion)’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이론은 얻은 것의 가치보다 잃어버린 것의 가치를 크게 평가하는 걸 말합니다. 천원을 잃었을 때 느끼는 상실감은 같은 금액인 천 원을 얻었을 때 느끼는 것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약 2배의 차이가 난다는 것 또한 실험을 통해 증명해 내었습니다.
사랑하고 이별했을 때를 떠올려 볼까요? 사랑할 땐 그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돈이든 마음이든 정성이든 시간이든, 사랑의 순간을 영속할 수 있다면 목숨이라도 내어 놓을 기세입니다.
그러나 이별이라는 ‘손실’이 왔을 때 우리는 주저앉게 됩니다. 사랑과 사람을 잃었다는 그 느낌은 무엇으로도 표현을 다할 수 없습니다. 온 우주를 동원하여 사랑했다면, 정서적으로 그 우주의 2배 충격을 받게 되는 겁니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그 충격은 과거의 그것일지라도 떠올리기가 무섭습니다.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데.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더불어 이러한 후회 속에는 이익과 손실이 복합된 요상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납니다. 바로 ‘본전’입니다. ‘본전’은 ‘무언가를 시작할 때 처음 들어간 가치’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무언가를 잃더라도 손해되지 않는 마음의 최소 상한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잃고도 ‘본전’이라고 생각하면 ‘나는 무언가를 잃지 않았다’라고 자기 합리화를 할 수 있으니 말이죠.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손실 회피를 줄이기 위해 언제나 ‘본전’을 생각하며 삽니다. 하지만 ‘본전’을 떠올리는 순간 우리는 이미 손해를 보게 됩니다. 손실이나 상실에 대한 아픔을 줄이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다는 뜻이 되니까요. 더더군다나 사랑과 이별을 할 때, 또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준 것과 받은 걸 재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왠지 모를 패배감과 좌절감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때는 기대하지 않고 주는 게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내가 이만큼 주면 더 큰 걸 돌려받겠지, 라는 생각이 더욱 ‘본전’에 대한 집착을 키우는 촉매제가 됩니다. 동시에 준 것보다 덜 돌려받는 나는 스스로 ‘호구’가 되어버리고요.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
이 말의 의미를 좀 더 헤아려보면, 내가 손해 본 것은 금방 잊고 누군가로부터 받은 건 깊이 기억하라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 반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호구가 되지 않도록 그 의미를 끊임없이 의식해야 합니다. 자진해서 더 주는 사람은 호구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손해 보는 것 같지만 더 길게 보고, 더 멀리 봤을 때 얻는 것이 많다면 호구가 아닙니다.
상대방이 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걸 깨달음과 배움이라 말합니다. 어떤 이익이나 손해를 맞이했을 때 본전보다도 먼저 떠올려야 하는 것이 있는 겁니다.
스스로 호구를 자처했던 스스로를 반성하며, ‘본전’ 생각은 잠시 뒤로 미루기를 바랍니다.
원문: 스테르담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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