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이분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짙다. 정말 그럴까? 해야 하는 일을 하며 살면 불행한 삶이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면 무조건 행복한 삶일까?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 그 둘은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도 아주 격하게. 그리고 시너지 효과를 내며 ‘성장’이라는 선물을 안겨준다.
- 「하고 싶은 일 하고 살라는 달콤한 거짓말에 속지 마라」, 『직장 내공』
때때로 불행하다는 느낌은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자각에서 온다. 단적인 예로 직장인이 그렇다. 회사 체질이 아닌 사람들이 모여 하고 싶지 않은/해야 하는 일을 하는 곳이 직장이다 보니 행복하기보단 그렇지 않은 순간이 더 많은 것이다. 그래서 ‘다 때려치우고 내가 하고 싶은 일 할 거야 = 나 퇴사할 거야!’란 직장인 허언을 항상 달고 산다(다른 허언으로는 ‘나 유튜브 할 거야’ ‘나 술 끊을 거야’ ‘나 다이어트할 거야’ 등이 있다).
‘해야 하는 일’은 언제나 산적해있다. 회사일뿐 아니라 개인일도 포함된다. 운동하기, 독서하기, 쓰레기 버리기, 세금 내기, 방 정리하기 등등. 쳐내고 쳐내도 줄지 않는 ‘해야 하는 일’ 속에서 우리는 아등바등하며 산다. ‘해야 하는 일’은 마치 살아서 분화하는 것 아닐까란 의문까지 든다. 증식하는 그 힘과 모양새가 참 대단하다고 감탄을 하며, 그것에 자주 압도되고 만다.
‘해야 하는 일’의 의미와 선물
그러나 너무 슬퍼할 일만은 아니다. 『직장 내공』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해야 하는 일’은 우리에게 의미가 있고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주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툭 던진 말에 순간의 위로를 받았다가 다시 무기력해지기를 거듭하는 제자리걸음을 중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서로 요동하며 오간다.
둘째,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는 ‘해야 하는 일’이 반드시 수반된다.
셋째, ‘해야 하는 일’은 많은 선물을 안겨준다.
넷째, ‘해야 하는 일’을 하다 보면 ‘하고 싶은 일’이 보인다.
- 「하고 싶은 일 하고 살라는 달콤한 거짓말에 속지 마라」, 『직장 내공』
우리가 시간 계획을 수립하는 이유는 바로 ‘해야 하는 일’을 위해서다. 정해진 시간 안에, 기한 내에 해야 하는 일이 수두룩하고 해결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갈 수 없거나 먹고사는데 지장이 생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간 관리뿐 아니라 의지를 관리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간을 잘 쪼개 확보해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해야 하는 일’이라면 특히나 더.
확보된 시간 앞에서, 우리는 ‘해야 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머뭇거리거나 딴짓을 하게 된다. 이런 악순환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해야 하는 일’이 그토록 싫어서 확보된 시간 앞에서 머뭇거리는 지긋지긋한 내 모습을 바꿀 수 있을까?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는 마법의 리스트 작성법
사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다름 아닌 내 이야기다. ‘해야 하는 일’ 앞에서, 심지어는 ‘하고 싶은 일’ 앞에서 쭈뼛쭈뼛 대는 나 자신은 정말 밉다. 언제까지나 나 자신을 미워할 수 없기에,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기로 했다. 나는 ‘해야 하는 일’ 리스트(To do list)를 항상 작성한다.
해야 하는 일
- 회사 업무 보고서 작성하기
- 운동하기
- 독서하기
- 글쓰기
- 방 청소하기
- 어학 공부하기
- 콘텐츠 만들기 등
이렇게 적어 놓고, 하나하나 완료한 일들을 지워나가는 방식이다. 그런데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영 하기 싫은 일이 대부분이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동기부여도 되지 않는다. 미루면 미룰수록 마음은 불편해지지만, 그렇다고 열정적으로 달려들지도 않는 상황 속에서 자책감과 자괴감은 커져가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음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해야 하는 일’은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왔는가? 하지 않으면 누구의 마음이 불편한가? 또 하지 않으면 손해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것을 해내면 득을 보는 사람,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나’다. ‘해야 하는 일’ 모두는 나를 위한 것이었고, 해내면 수혜를 받는 것도 오롯이 ‘나’인 것이다. 바꿔 말하면, ‘해야 하는 일’은 무의식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인 것이다. 이것을 해내면 좋을 거라는 무의식과 욕구가 반영된 것이다.
그래서 ‘해야 할 일’에 취소선을 긋고, 그것을 ‘하고 싶은 일’로 바꿔봤다. 물론, 리스트에 있는 내용은 그대로다. 그런데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적어 놓은 것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해야 하는 일’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찬 삶이 ‘하고 싶은 일’로 가득 찬 생경하고도 충만한 날들로 바뀌었다.
하고 싶은 일
- 회사 업무 보고서 작성하기
- 운동하기
- 독서하기
- 글쓰기
- 방 청소하기
- 어학 공부하기
- 콘텐츠 만들기 등
물론, ‘하고 싶은 일’이 반대로 ‘해야 하는 일’로 돌변하는 경우도 있고, ‘하고 싶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있으니 100%다 지켜내진 못한다. 그러나, 예전엔 리스트 완료율이 50%도 채 되지 않았다면 이렇게 리스트의 제목만 바꾸었는데도 80% 이상을 나는 해내고 있다.
마치며
어찌 보면 말장난 같기도, 또 대단하지 않은 방법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기대 이상의 변화와 희망찬 동기부여로 인해 확실히 예전보다는 마음이 편하고 많은 걸 이루어낸다는 것이다.
내가 ‘해야 하는 일’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둘은 등을 맞대고 있는 게 아니라, 어깨동무가 어울리는 사이다. 나의 양 옆에, 그 둘과 어깨동무를 하고 사이좋게 앞으로 나아간다는 관점이 필요하다. 서로 다른 곳을 보던 존재들이, 다 같이 한 곳을 바라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에너지가 차오른다.
‘해야 하는 일’이라 쓰고, ‘하고 싶은 일’이라 읽는 지혜. 다름 아닌 ‘나’와 ‘내 시간’을 위한 현명한 생각이자 지금 당장 움직일 수 있는 힘이다.
원문: 스테르담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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