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건물주로 태어나지 못했을까?
하루를 열심히 살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주저앉을 때가 있다. ‘나는 왜 건물주로 태어나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 그렇다.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미 이룬 존재들을 보면 유쾌하지 않은 마음이 한없다.
건물주가 되고 싶은 이유는 단연코 돈 때문이다. 돈 걱정 없이 살고 싶다는 것이다. 돈 걱정이 사라지면 뭐가 좋을까?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얽매이지도 않으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한낮의 카페에서 나만의 글을 쓰다 여유롭게 산책하는 것. 몸이 찌뿌둥할 때 원 없이 마사지를 받거나, 가족들과 맛있는 식당에 가서 가격표를 보지 않고 주문하는 것 등이 그렇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아마도 미래에 대한 걱정이 줄어드는 것 아닐까?
성공하고 싶은 이유
왜 그렇게 성공하고 싶으세요?”
“성공해야 대접받으니까요!”(영화 양자역학) 남자 주인공의 대답엔 주저함이 없었다. 질문과 대답 사이엔, 1초라는 순간이 존재할 틈도 없어 보였다. (중략)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는 건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를 쓰고 남들보다 더 높아지려 하고, 많이 가지려 한다. 내가 한 단계 올라가면, 두 단계 위 사람이 보이고 그 이상 위로 가도 더 위에 있는 사람을 보며 성공이라는 단어는 좀 더 위로 갔을 때 쓰자며 아껴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를 대접한다고 생각해보자. 내가 나를 대접하면, 성공의 기회가 많아진다. 넘어지더라도, 지금까지 온 거리를 성공으로 간주할 수 있다. 좋은 것들은 ‘추억’으로 생각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경험’이라 생각할 여유가 생긴다.
- 『견디는 힘』 「사실 나는 잘되고 싶다」 중
성공은 곧 돈과 직결된다. 그 성공을 기반으로 다른 사람이 우러러보는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 출근할 때 기사가 운전하는 차가 오고,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모두가 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다면 성공했다는 자아도취에 흠뻑 빠질 것도 같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그러한 성공을 거머쥐고 싶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내 성공의 기준을 남에게 맡기는 것이 아닐까 의문이 든다. 남이 나를 어떻게 대접해 주느냐에 따라 내 성공이 좌우되는 느낌. 남이 내게 머리를 조아리거나 환호하는 정도에 따라 내 성공의 정도가 정해진다면 좀 서글플 것 같다.
『견디는 힘』 본문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다. 그러니까, 성공의 기준을 ‘남이 나를 대접해주는 것’에서 ‘내가 나를 대접하는 것’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나는 나를 대접하기로 했다
다시, 정신 차리고 기준을 나로 바꿔보자. 그러면 성공은 어느새 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건물주가 되다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이 없다면, 내가 돈이 얼마 이상만 있다면… 여러 단서를 달아 미루었던 일들은, 거짓말처럼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던 일들이었다.
당장 휴가를 내고 하루만큼은 업무에서 벗어나 보자고 다짐했다. 아침에는 출근하는 사람들의 반대 방향으로 걸으며 집 주변 내천을 따라 산책했다. 한낮의 카페에서 글을 썼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 미루고 미루던 마사지를 받았고, 저녁에는 가족들과 (가격표를 보며 미리 계산하지 않고) 식당에서 소고기를 먹었다.
더불어, 저녁에는 내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나하나 적어 나갔다. 막상 실제로 적으려니 구체적인 걱정거리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걱정들이 안개 사라지듯 걷히니, 남은 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두렵기만 했던 미래가 오히려 희망차 보였다. 이렇게 나는 평생 못할 것 같은 일을 단 하루 만에 해냈다. 성공을 단숨에 느낀 것. 이것은 내가 나를 대접하기로 결심한 후에 일어난 일이다.
나는 돈이 없던 게 아니라, 마음의 여유가 없던 것이다. 나는 마음의 여유가 없던 게 아니라, 성공의 기준을 남에게서 찾은 것이다. 나는 성공의 기준을 남에게서 찾은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제대로 대접하지 않은 것이다.
나를 제대로 대접하면 할수록, 성공의 기회는 많아진다. 일확천금이 당장 없어도 당장 먹고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행복을 기꺼이 ‘성공’이라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여유가 생긴다.
살다 보면, 나는 또 나 스스로를 대접하는 걸 소홀히 하며 감정의 악순환에 빠질 것이다. 슬럼프든 번아웃이든, 그 어떤 유쾌하지 않은 손님이 와도 나는 세상과 남이 나에게 왜 이러는지 탓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나 스스로를 얼마나 잘 대접할지부터 돌아보자고 마음먹는다.
이미 이룬 성공조차 실패와 좌절로 만드는 건, 내가 나를 대접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이란 걸 이젠 알았으니.
원문: 스테르담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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